입술이 예뻐지는 립밤을 친구가 추천해 줬다며,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립밤을 사러 다녀온 게 엊그제.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뜨개실을 손에 들고 있는 나는 이런저런 아이템을 뜨는 것을 즐기는데, 새로운 아이템을 발견하고는 얼른 만들어서 아이를 불렀다.
"립밤 가져와봐~~"
안 그래도 소중한 입술을 촉촉하게 핑크빛으로 물들여주는 더 소중한 립밤인데, 엄마가 만들어준 립밤 케이스는 아이의 마음도 촉촉하게 만들어줬나 보다. 립밤을 손목에 걸고 빙빙 돌리며 등굣길에 나서는 뒷모습에 흥이 넘친다. 그래, 넌 아직 사춘기가덜 왔구나.
"립밤 추천해 줬던 친구 거도 엄마가 만들어줄 테니 선물할래?"
그랬더니, 친구 두 명의 립밤 케이스를 주문받아 왔다. 엄마 옆에서 실 색깔을 같이 고르면서 나온 한마디.
"엄마, 나는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 "
순간 심쿵! 돌연 날아든 아이의 사랑 가득한 한마디에 내 마음이 어질어질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건, 이 둘째 녀석을 낳고 나서였다. 첫째를 낳고도 복직, 둘째 낳고도 복직했지만, 해가 다르게 바뀌는 반도체 기술 사이클을 휴직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힘에 부쳤다. 1년 365일을 단 1초도 쉬지 않는 반도체 현장에서 육아를 위해 일찍 퇴근하는 여자 엔지니어는 남초 현장에서 눈칫밥 먹느라 배가 터질 지경이었으니, 집에서도 죄인, 직장에서도 죄인으로 사는 것이 완벽주의자에게는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핑계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엄마랑 떨어지는 걸 싫어했던 내 기준에서 아이들을 내 시야 밖에 두고 키우는 것은내가 분리불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나는 양자택일, 엄마를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다들 말리는 경력단절, 아니 경력 보유 여성이 되었다.
내 청년기 노력의 결과물인 일을 포기하는것은 정말힘든 결정이었지만, 두 딸아이의 예쁜 모습을 내 눈에 오롯이 담아 키우는 것은 정말 반짝이는 날들이었다. 공들여 땋은 디스코머리와 팔랑팔랑 원피스 차림의 언니와 유치원 앞에서 '빠이빠이~'하고 아장아장 둘째와 산책하던 일상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하는 표정을 마주하고 아이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공감하던 그 순간도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생각이 없다. 물론 두 살 터울 자매를 독박으로 키우는 것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린이집에 갔는지도 모르는 채로 회사에서도 근근이 버텨내던 때보다는 훨씬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렇게 사회적 소속감 아닌 가족 내 소속감만으로 10년, 둘째의 띠가 한 바퀴 돌아 내년이 용띠 해라고 하니, 아이들은 이제둘 다사춘기에 접어들었다.
둘째가 4살이 되던 해 어린이집을 보내고 나니 처음으로 내 시간이 생겨, 늘 관심이 가던 뜨개를 취미 삼아배웠다. 꾸준히 뜨개를 즐기면서 블로그 활동을 하고 도안을 만들어 나누다 보니 복지관에서 뜨개 강의를 하는 기회로 이어졌다. 벌이는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즐기는 것을 가르치고, 또 배우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회사에서 지시받은 형식적인 업무를 할 때보다 훨씬 큰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뜨개 강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올해 중학생이 된 큰 아이가 직업을 조사하고 인터뷰해서 글 쓰는 활동을 한다고 엄마에게 인터뷰 요청서를 내밀었다. 정중한 인터뷰 사전 질문지를 동봉한 수행평가 과정이었던 것. 그때 든 생각은, 첫째로, 내가 좀 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두 번째, 아빠를 인터뷰하면 될 텐데였다. 남편은 기업체의 재무부서에서 회사의 돈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선생님, 경찰관, 의사처럼 역할이 눈에 드러나 보이는 직업이 아니긴 하다. 그러니 인터뷰를 하기엔아이들 눈에 컬러풀하게 보이는 직업, 뜨개 강사가선택된 것이겠지.
기쁘기보다는 왠지 씁쓸했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에게는 '옆에 있는 엄마' 보다는, '커리어 우먼 엄마'가 더 좋겠구나. 벌써 열두 번도 더 가정해 본, '안 그만뒀다면'을 또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선배 엄마들이 말한 게 이런 기분이었군.그런데 인터뷰 질문 중, '어떤 때 보람을 느끼시나요'에 대한 대답을 딸이 녹음하고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뜨개를가르치며느꼈던성취감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게 아닌가.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한참 고심하다가 상투적인 답을 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핸드폰의 녹음 종료 버튼을 누르며 큰 아이가 말했다.
"와! 엄마 말 잘하네? 대본도 없이?"
예비 연습으로 교과목 선생님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했었는데, 선생님들은 대본을 미리 준비해서 읽어주셨단다.
(솔직히 녹음까지 할 줄은 몰랐단다. 대충 말하면 될 줄 알았거든.)
나는 내가 느꼈던 뿌듯함과 성취감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뜨개 강사라는 직업을 스스로평가절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때가 묻은, 내 딸은 더 큰 직업적 목표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현실 속물 엄마인 내가 있었다. 인터뷰 요청서를 내밀던 큰 아이의 머릿속에는 아직 자본주의의 때가 침범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내가 느꼈던 것의 가치보다 사회에서 높게 매기는 가치의 편에 서서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나라는 엄마. 이중적인 내가 싫었다.
그랬던 나에게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둘째의 한 마디는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컥 토해져 나오는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크게 보아주고 있는 아이들.나는 어떤 사람이지? 하는 되물음으로 스스로를 되짚어보게 되었다.딸들을 통해 내 모습을 비춰보니,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엄마, 스스로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해도 되는 엄마가 보인다. 그래, 남들의 인정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닐까.그런 엄마의 모습이 둘째의 자랑스럽다는 한 마디로 표현됐다는 생각에, 내 자존감이 손가락 마디 한 개만큼 올라갔다.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의 내면과 자존감을 보듬어주는 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단단하게 키워내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 그것이 나의그 어떤 커리어보다도 훌륭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딸들 못지않게 성장하고 있는 나를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