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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Mar 15. 2024

반장이 뭐길래

"아! 나 반장 하고 싶은데!"


벌써 몇 번 째인지. 내일 반장 선거를 앞두고, 엊그제부터 출마 여부를 두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중이다. 5학년을 마치면서 '6학년에는 내가 반장을 해야겠어!' 하길래, 기특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쟁쟁한 친구들을 보니 슬그머니 새가슴이 되는 모양이다. 떨어지면 쪽팔리니까 안 나가겠단다. 새로운 도전을 여간해서는 잘 안 하는 아이라,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은근히 부추겼다. 좋게 보면 용기를 북돋아주는 엄마지만, 속으로는 우리 아이도 반장 한 번쯤은 해봤으면, 하는 엄마의 욕심이다. 앞에 나가서 연설하는 게 떨려서 하기 싫다고, 안 나갈 이유를 나열하는 것을 보고 니 맘대로 해라, 내버려 두었는데, 선거 전날 밤 10시에  다시 번복하는 녀석.


"안 되겠어! 나가야겠어!"


공약을 정하고, 연설문을 쓰고, 현란한 발표 자료를 만든다. 그래놓고도 잠자리에 누워서는,


"아우, 떨리는데 어떡하지."




중학생 큰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에 영 관심이 없었다.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주도하기를 좋아하고 착실한 면도 있어서 반장을 한번 해봤으면 했는데, 역시 엄마의 욕심일 뿐.


"아니, 내가 왜 반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놀 시간도 없거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욕심이 안 나지? 초, 중, 고 때 반장을 여러 번 해봤던 나는, 나보다 잘날 것 없는 녀석이 반장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나와는 너무 다른 첫째의 말은 도무지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와 같은 속은 둘째가 가지고 있었던지, 둘째 녀석이 반장에 욕심을 내보이니, 이리 반가울 데가 있나. 연설을 연습하는데 청중이 되어주고, 마음속 응원을 다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반장 선거 당일, 긴장하며 등교하는 녀석을 꼭 안아주며,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떨어지는 것도 경험이다, 했지만 이왕 간신히 용기 낸 거, 제발 반장 돼서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오고, 드. 디. 어. 전화벨이 울렸다. 부러 태연하게 받았다. 응, 그래. 준비해 간 건 잘했어?


"아니, 떨어졌어. 5표밖에 못 받았어......"


이를 어쩌나.


"괜찮아. 떨어져도 엄마는 칭찬해. 준비해 간 거 해낸 것만도 대견해. 잘했어!"

"근데, 엄마. 후보 두 명만 가지고 다시 투표를 했는데, 내가 기권표를 내서 지연이가 반장이 안 됐어. 나 때문이야......"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남녀 각 2명씩 출마를 했는데,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씩은 5표씩 받고 떨어지고, 과반수가 넘은 남자 후보 한 명, 여자 후보 한 명이 최종 투표를 다시 했단다. 아이의 반은 총 29명인데, 여자가 15명, 남자가 14명으로 여자가 한 명 많았다. 초등학교 5,6학년쯤이 되면 성별이 갈라져서 어울리는 탓에 여자 아이들은 여자 후보를, 남자아이들은 남자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둘째 녀석이 기권표를 던지는 바람에 14 대 14 동점이 되었고, 규정 상 생일이 빠른 사람이 반장이 된다나, 남자아이가 반장이 것이다.


속으로 외쳤다.

'젠장, 늦게 태어난 죄냐. 그럴 거면 ㄱㄴㄷ 순으로 정하지? 차라리 가위바위보를 하는 게 공평하겠네.'


그나저나, 웬만큼 상황판단을 할 줄 아는 6학년이니, 아이들이 술렁대는 건 당연지사.


"여자 누군가가 기권표 냈나 본데?"


이런 말이 녀석의 귀에 흘러들어왔으니, 마음 한가운데를 쿡 찔린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통화할 때, 나도 모르게, 아이를 탓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왜 기권표를 냈어. 둘 중에 한 명 뽑지......"


여자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것이 걱정된 내 무의식이 아이를 탓하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아이가 집에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한 말이 후회되었다. 5표를 받아 떨어졌으니 속상했을 테고, 나 아닌 다른 두 후보 중 누구도 뽑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기권표였을 것이다. 기권표를 낸 사람이 콕 집어 누구일지 애들이 알 수도 없을 테니까. 본인이 기권표를 냄으로 해서 동점이 될 것까지 예상하고 기권표를 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결과로 남자 친구가 반장이 될 것까지는 예상 못했을 터. 게다가 친구들의 수런거리는 한마디 말에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힘들어질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아직 12번째 생일도 지나지 않은 어린 용띠인 것이다.


아이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과 감정에 어쩔 줄 몰라했다. 반장에서 떨어진 것 보다도 자신 때문에 반장이 되지 못한 여자 후보에게 미안함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심리가 그런 거겠지. 친구들 사이에서 튀고 싶지 않음 마음,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새 학기 일주일 만에 훌쩍거리며 우는 녀석을 보니, 반장에 욕심을 낸 내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공공의 적이 될까 내심 걱정이 되어, 아이를 단속했다.


"기권표 낸 사람이 나라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

"네가 힘들어질 수 있어. 엄마는 네가 왜 기권표를 냈는지 알 것 같아. 나는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을 뽑고 싶었겠어? 당연히 안 뽑고 싶었겠지. 기권도 선택지 중 하나야. 대통령 선거에서도 칸 안에 도장 안 찍고, 그 사이에 찍는 사람도 있는걸?(과연 있을까?) 네 잘못이 아니야.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그런데 다른 여자 친구들 입장에서는 여자가 반장이 못됐으니까, 기권한 사람 탓을 하게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거든. 입장 차이야.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시간이 좀 지나면 금방 잊힐 거야. 괜찮아."

"그런데...... 나영이한테는, 말을...... 했어......"


다시 또 한숨이 나온다. 불안이 큰 나는 또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을 펼쳐 스스로를 괴롭힌다. '기권표 낸 게 누구라더라, 기가 센 여자 친구가 와서 윽박지른다, 야! 너 때문에 남자가 반장 됐잖아!' 이제 새 학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새 학기 새 친구 사귀는 꿀팁' 영상까지 시청하면서 시작한 3월인데, 초반부터 일 년 치의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는 듯하다. 이런저런 대화에도 아이의 마음은 쉽게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을 심란하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나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소식을 접한 다른 가족들의 반응을 보자. 남편은 어쩜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지.


"괜찮아, 금방 잊혀."


동생의 소식을 접한 중학생 언니의 반응은 신박하다.


"그런데, 기권표도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였으면, 무조건 둘 중에 하나 뽑아야 되는 줄 알고, 그냥 아무나 뽑았을 텐데."


평소에도 닮았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이다.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에이, 괜찮아.', '에라, 모르겠다.'가 가능한 부녀. 나는 그게 어렵다. '에라 모르겠다.'가 가져올 결과는 도대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아빠보다는 엄마 성향에 가까운 둘째는 기권표를 던질 때에도 한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안쓰러운 녀석.


주말이 지나고 힘겹게 등교하는 뒷모습을 보며, 반 친구들이 부디, 성숙하게 행동해 주길 기도했다. 종교도 없는 내가, 반장선거날 아침의 기도 외에 또 기도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거늘. 주말 이틀 쉬는 동안, 기권표를 던진 누군가에 대한 관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기를...... 그래, 내 아이는 이 상황을 겪으면서 한 단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 성숙과 성장의 길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하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6학년이나 된 아이를, 막내라는 안쓰러움 한가운데 놔두고 어떻게든 해결해줘야 할 것만 같은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교까지의 시간은 마치, 제왕절개 후 아픈 배를 부여잡고, 수술 후 첫 가스가 어서 나오도록 병원복도를 왔다 갔다 걷는 기분이었다. 드. 디. 어.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나 친구랑 놀다 갈게!"


허허. 그래, 오냐. 나는 뭘 걱정했던 걸까. 6학년 3반 성숙한 여자 친구들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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