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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May 10. 2024

우리의 금메달, 아빠와 딸과 농구공

그래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했다. 장남에 장손인 남편, 아들이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시부모님의 무언의, 아니 유언의 압박도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가 당당하고 싶어서였다. 여자가 어때서, 딸이 어때서,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했으니 가부장적인 시선들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어쩔 수 없는 소심한 며느리였다. 그런 부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우리 두 딸의 태명을 보자. 성별을 알기 이전에 지은 태명임에도 불구하고, 첫째 딸의 태명은 왕! 건강하라고 왕건이, 둘째 딸의 태명은 시어머니가 꾸었다는 태몽에 대추가 나왔다는 호들갑 덕분에 대추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살 터울로 나란히 태어난 손녀들에 서운했던 시어머니는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도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성화였고, 그때까지도 시어머니에게 휘둘리던 나는 정말 하나 더 낳아야 하나, 아들 없으면 정말 나중에 섭섭하려나,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하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가 2012년생이고, 아들 낳으라는 성화는 2010년대 내내 이어졌으니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근 10년 사이에 여아 선호 경향이 더 커져 반전이 일어나고 있으니, 나 조차도 내 이야기가 조선 시대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최근에 '좋겠다, 부럽다'는 말을 건넸던 지인들을 보면, 아들 둘이거나, 딸 하나인 엄마들이니, 이것이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인가. 두 딸의 엄마가 되었을 때, '딸 둘이면 금메달, 딸/아들이면 은메달, 아들 둘이면 동메달'이라는 말이 막 생겨났을 때였다. 당시에는 이 말이 선심 쓰는 듯한 위로로 들렸다. 그러나 요즘은, 두 녀석 모두 사춘기에 접어들었을지언정, 내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구나 느끼곤 한다.




지난 주말, 우리 부부는 배드민턴을 치고 싶다는 둘째와 함께 근처 공원에 나갔다. 고등학교 때 농구를 즐겼다는 남편은, 한적한 농구대를 발견했다고 반가워했었기에 20년도 넘어 때가 탄 농구공에 바람을 넣어 챙겼다. 농구장이 훤히 보이는 벤치에 앉아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6학년인 둘째는 줄넘기를 하다가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자전거로 한 바퀴 돌고는 벤치에서 책 읽는 엄마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운동이라면 손을 내젓는 나였기에 둘째의 배드민턴 상대가 되어주는 정도로 나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고, 다만 선선한 봄 그늘 아래서 책에 심취해 있고 싶을 뿐이었다. 남편은 얼마 만에 만져보는 농구공이냐 하는 심정으로 농구대 근처에서 드리블 연습을 하다가 슛을 날려보고 있었는데, 골인에 성공을 했을 때도, 실패를 했을 때도, 내 쪽을 흘끗흘끗 한 번씩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책에 열중하기를 포기하고, 남편의 슛을 보며 감탄 혹은 아쉬움의 표정을 날려주는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 남편이 열중하고 있는 농구대 앞에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열심히 슛을 날리며 놀고 있었는데, 조금 전부터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가가서 패스하며 웃고 있는 것을 보니 형제의 아빠인 듯했다. 


'농구하는 형제와 아빠'가 배경으로 깔리고 나니, 나 홀로 공놀이하는 남편이 외로워 보인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농구, 야구, 축구, 공이라면 다 좋아하는 남편과 신나게 공놀이를 했을 텐데, 하는 안쓰러움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딸 둘의 아쉬움이 드러나는 몇몇 장면이 있는데, 가족이 다 함께 목욕탕에 가거나 물놀이 후 샤워장으로 나눠질 때, 남편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 이런 때다. 이제 나는 딸아이보다 남편에게 더 시선을 던지며, 관심과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아이도 느낀 걸까. 아빠가 던지는 공에 기웃기웃하더니, '한번 해볼래?' 하고 아빠가 건네는 공을 쑥스럽게 받아 든다. 아마도 학교에서 피구공, 배구공은 잡아봤어도 농구공은 처음 만져보지 않았을까 짐작하며, 아빠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딸이 한편으로 고맙고 기특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농구대 아래에서 슛 날리기두어 번 실패하더니 몇 번 만에 골인을 성공하는 녀석!


"우와! 성공!"


비교적 먼 거리에서도 남편과 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눈빛으로 교환한 놀라움과 감탄의 감정이 공중에서 만났다. 남편의 슛 성공에 비해 너무 과한 반응이었어도 어쩔 수 없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아들일 뿐, 내 새끼의 성공에는 남편의 성공의 10배, 아니 100배의 감탄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자 시야가 조금 더 넓어져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반대쪽 농구대에 있는 가족이었는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과 중년의 아버지가 농구를 하고 있었다. 딸이 드리블하며 다가서고 아빠는 막아서는 그 뒤로 터울진 남동생인지 4,5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엄마와 손잡고 있었다. 아빠와 딸이 농구하는 장면이라니. '아빠와 아들'이라는 공식만 가지고 있던 내 머릿속에 새로운 바람 한 줄기가 스윽 스쳐 지나갔다.


슛 성공에 힘입어 딸아이는 그 후 1시간 동안 줄넘기와 배드민턴, 자전거를 다 내팽개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빠와 농구공을 주고받았다. 여고 시절 체육시간, 농구 슛 20개를 던져 골인 개수를 카운트해서 점수를 매기는 평가가 있었다. 한 달여 기간의 연습 후에도 나는 그 평가에서 10개도 넣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딸아이의 농구는 아빠를 닮은 것이었다. 저게 들어간다고? 초심자의 행운이 가져온 골인이 아니었다. 농구공을 처음 잡아본 아이의 계속되는 슛 시도에서 서너 번 중 한 번은 골인을 시키는 장면은 내 눈에도 너무 놀라웠다. 남편의 눈도 휘둥그레졌음은 당연했다. 아까의 외로운 남편은 온데간데없고, 딸아이에게 공을 패스해 주고 현란한 드리블을 보여주 가르쳐주는 남편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학교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면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나'라는 자랑을 늘어놓았던 아이였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아서 요리조리 잘 피하겠거니, 공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을 잘하는 것이려니 했었다. 특출 난 운동 신경은 아니더라도 아빠와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운동신경이나마 닮은 것이 너구나.


같은 성별의 엄마와는 학령기 아이들의 자잘한 활동에서 나를 닮았구나 싶은 교감이 종종 있었으, 아빠와는 교감하는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내 앞에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남편에게 아들 없는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있는 만큼 나처럼 남편의 생각도 바뀌고 있을 것이고, 딸과의 공놀이에서 느낀 점도 있겠지. 아직도 딸들 뺨에 뽀뽀도 해주고, 포옹도 곧잘 하는 남편도 본인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땀 뻘뻘 흘리며 물 마시러 다가온 부녀에게 말했다.


"아들 둘이랑 농구하는 아빠를 보니까 당신이 좀 짠했거든. 그런데 세상에, 우리한테는 이 녀석이 아들이었네! 운동 신경은 확실히 아빠 닮았어."


그날 이후로, 배드민턴 치러, 자전거 타러가 아니라 농구하러 공원에 가고 싶다는 녀석. 이제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은 첫째 딸과 달리, 둘째는 친구 좋아라 하는 사춘기가 좀 더 천천히 왔으면 하고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 공은 왜 이렇게 새카매?" 하고 묻는 딸 옆에서 농구공을 굳이 새로 살 필요가 있겠냐고 했던 남편에게 말했다.


"새 걸로, 좋은 걸로 하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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