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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Jan 26. 2024

눈과 나의 이야기

동생과 오랜만에 안부 통화를 했다.


"올해는 정말 눈이 많이 와. 오늘도 앞이 안 보이게 와서 애들 학원도 못 가게 생겼어."


창밖을 무심히 한번 돌아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맑은 하늘에 햇빛마저 반짝이는 쾌청한 하늘이 어이없어서다.


벌써 1월 말이건만 이곳 대구는 올 겨울, 간간이 눈발이 날린 것을 제외하곤 새하얗게 눈 쌓인 거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청주, 동생은 성남, 결혼하고 각자 다른 지방에 자리 잡았지만, 차로 1시간여 거리라 종종 오가고 날씨 얘기로 공감하는 자매 간 대화도 일상적이었다. 그러다 작년 1월 말,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동해 왔고, 대구에서의 첫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 뉴스 기사를 통해 폭설이니, 한파니 하는 뉴스를 접해도 물리적인 거리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청주에서는 경기도에서 비를 쏟아내던 시커먼 비구름이 그대로 남하하여 비슷한 날씨가 이어지곤 했다. 수도권의 날씨와 한두 시간의 시간차가 느껴지는, 선형적인 이동이랄까. 수학적 함수에서 시간이나 거리에 비례하는 1차 함수 같은 느낌이다. 맞다. 나는 이과 출신이다. 그런데 먼 타향에서 느끼는 날씨는, 2차 함수라고 해야 하나. 남하하던 눈구름은 포물선의 기하급수적인 곡선을 따라 하늘 위로 증발해 버리는 모양이다. 그러니 수도권 중심의 날씨 예보는 알아서 걸러서 이해해야 하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TV 지역 방송의 날씨뉴스를 시청하면 우리 지역의 날씨를 알려주니 간편하긴 하지만, 여기서도 어색함은 존재한다. 친정이 있는 대전 지역방송은 TJB였다. 그리고 결혼 후 자리 잡은 청주에서 15년간 CJB에 익숙해져 살다가 대구에 오니 여기는 TBC다. 채널 이름도 낯설지만 지역마다 지명이 다르고 지자체의 중심 사안이나 정치적 감성도 다르니 뉴스의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날씨 예보에서도 물론 전국 지도가 먼저 나오지만 내 지역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지역 땅덩어리가 저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주변 지역명과 함께 학생 시절 익혔던 우리나라 지리 공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다. 충남, 충북, 경북에 두루 걸쳐 살아보는 것도 흔하다면 흔하지만 이 또한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들은 결코 모를 다양한 지역방송의 묘미이기도 하니까.


오늘로 이사 온 지 정확히 1년이 되었다. 작년 1월 말 이사오던 날이 떠오른다. 추운 날씨에 베란다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짐을 내리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굵어졌다. 이삿날이라고 지인들의 안부 메시지가 속속 도착했는데, 이삿날 눈 오면 부자 된다더라는 말로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이삿짐을 다 실어 보낸 후 고속도로를 달려 대구로 내려오는 밤길, 어딜 감히 낯선 지역에 발을 들여놓느냐는 듯이 굵은 눈송이들은 운전대를 잡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지러웠다. 전학하여 새로운 학교와 친구들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들 걱정, 전혀 연고 없는 지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될 우리 가족의 앞날에 대한 불안도 한몫했을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충북, 충남을 지나고 경북에 들어선 지 얼마쯤 지나 김천쯤이었을 것이다. 어지럽게 달려들던 눈송이가 어느새 녹아서 비로 변했다. 두 지역을 나누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 수십 킬로미터의 대기를 마침내 뚫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곳과 저곳 사이의 경계선의 두께를 넘어서면서 날씨의 변화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새 집으로의 이사를 마무리 짓고, 남편과 내 차 두 대를 근처 손세차장에 나란히 맡기러 갔다. 눈과 비를 뚫고 온 두 자동차는 거친 경계를 뚫고 새로운 세상에 이제 막 도착한 야생의 전사와 같은 험한 몰골이었던 것이다. 나란히 세워져 있는 두 차를 보고 세차장 사장님이 던진 한마디. “서울에서 왔능교?” 우리 부부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꽉 채운 1년을 살아보니, 대구의 겨울을 살아보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대구에서는 그런 몰골의 차는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며칠 전, 방학을 맞아 5학년인 둘째와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딸기 한 팩을 집어 들었다.


“여긴 군위 딸기네? 청주에서는 논산이나 청원 딸기였는데.”


그랬더니, 이 녀석이 깜짝 놀라며 말한다.


“엄마, 군위가 도시 이름이야? 난 군대랑 관련 있는 딸기인 줄 알았어!”


만 1년을 살면서도 우리 가족의 좌충우돌은 아직도 이러하다.




간혹 밤사이 눈발이 날리고 ‘결빙 주의’ 재난 문자가 오는 날도 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남편도, 운전 조심을 강조하며 배웅하는 나도 남쪽에서의 결빙 우려에는 비교적 마음이 가볍다. 화이트의 감성은 결핍일지라도 실생활에서의 이로움은 크기 때문이다. 눈길 운전의 위험도, 세차에 할애하는 시간과 비용도 덜어지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미세먼지가 확실히 덜하다. 코로나가 끝나고 중국발 미세먼지가 다시 늘어났음직 하지만, 겨울에 이렇게 햇빛이 반짝이는 날씨를 많이 느끼게 되니, 눈 감성 대신 햇빛 감성으로 채울 수 있는 환경에는 감사하게 된다.


대구에서의 1년 동안 나 역시 브런치와 함께 글 쓰는 사람이 되는 등 새로운 일상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어딜 가나 “다른 지역에서 오셨나 봐요?”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시간에 비례하여 이질감의 비율이 점점 낮아지며 동질감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꽤 굵은 눈발이 날리던 날, 중학생 큰 딸은 밤 9시임에도 친구와 눈을 맞아야 한다며 집을 나섰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고, 어디에서나 눈을 보고 느끼는 반가움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하나의 소재인 것이다. 남은 겨울 동안 이삿짐에 싸들고 온 썰매와 눈오리 집게를 써볼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기를 바라보면서 우리 가족의 ‘대구에서의 1년’을 자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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