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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Jan 19. 2024

모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여라

"어떤 애가 엄마보고 할머니래! 엉엉......"


줄넘기 학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에 들어서면서 목놓아 우는 녀석. 2024년 청룡의 해에 드디어 만 12살이 되는, 2012년 흑룡의 해에 태어난 우리 집 둘째 딸이자 막내다. 새해맞이 다이어트 결심으로 열심히 실내자전거를 타던 남편도, 방에 있던 중1 첫째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거실로 뛰어나왔다.


"걔가 길에서 나를 봤는데, 할머니랑 손 잡고 가는 걸 봤다고 그러잖아! 엉엉엉......"


헉! 친정도, 시댁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가족이니, 이 녀석과 손 잡고 가던 그 할머니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다. 이 녀석에게도 충격이었겠지만, 그 말을 듣는 나도 충격 그 자체. 할머니라고?! 일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


진정하자. 진정해. 내 충격은 우선 뒤로 미뤄둘지라도 이 상황을 어떻게든 둥글게 갈무리해서 저 녀석의 상처를 최소화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내가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긴 했는데, 그 모자가 나를 할머니로 만들었나 보다. 연말부터 피부과를 다니면서 얼굴의 기미를 손보고 있는데,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색깔이 진한 기미에 강한 레이저 시술을 하는 바람에 얼굴에 거뭇거뭇 딱지가 앉았다. 10군데가 넘게 점을 뺀 자리에는 습윤밴드를 덕지덕지 붙였고, 화장을 할 수도, 선크림을 바를 수도 없어서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가리고 눈만 내놓고 다닌 지 열흘이 넘었다.


"아하! 엄마가 요즘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 쓰고 다녀서 할머니 같아 보였나 보다. 1학년 짜리 동생이 그랬다고? 아직 어려서 보는 눈도 아직 철이 없네. 엄마 모자가 좀 나이 들어 보였나, 아니면 걔네 할머니가 엄청 젊은 할머니던가 둘 중 하나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엄마가 얼른 이제 예쁘게 하고 다녀야겠다."

 

아직 훌쩍이는 녀석은 엄마 말을 가만히 듣더니, 노여움이 조금은 잦아든 것 같다.  


"그래,  그 모자가 좀 별로긴 했어. 이제 벗고 다녀."

 

남편도 아이와 나의 심기가 걱정됐던지, 한 마디 거든다. 자세히 들어보니 괘씸한 말을 던졌다는 그 동생은, 놀려댄  건 아니고 같이 줄넘기를 하는 누나를 길에서 봤다고 아무 생각 없이 반가운 마음으로 얘기한 모양이다. 1학년 녀석의 엄마나 할머니는 훨씬 젊은 엄마와 할머니일 테니 오해할 만도 하지만, 아직 40대 초반인 나도 80년대생으로 MZ세대 끄트머리에 속하던데, 동안이면 동안이지 할머니로 보일만큼 노안은 아니건만. 모자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도 옅은 씁쓸함을 느끼며 아직 아기 같은 막내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달래주었다.


이 녀석의 분노 포인트는 뭐였을까.

(우리 엄마를 할머니라고 하다니, 말도 안 돼! 괘씸한 녀석!) 아니면,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할머니 같은가? 속상해. 엉엉....). 어쨌거나 엄마를 예쁘고, 소중하고, 젊게 생각해 주는 것이 느껴져서 그 마음은 애틋하게 느껴졌으나, 나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학부모가 됐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아직 30대 중반이었던 7년 전,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둘째 엄마들이 꽤 많아서 나는 비교적 젊은 엄마 축에 속했다. 그래서 내가 늙은 엄마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마흔에 둘째를 낳았다는 한 엄마는, 아이가 늙은 엄마를 부끄러워할까 봐 입학 전에 엉덩이 살을 떼다가 얼굴에 붙이는 성형 수술을 했다고 했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 아이와 친구들에게 보일 엄마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후로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이미지를 훼손당한 노여움에 엉엉 우는 아이를 보니 오히려 내가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외모를 가꾸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탓이다. 구두보다는 운동화에, 유행을 좇거나, 유명 브랜드를 좋아하지도 않고, 미용실은 1년에 두 번 정도 이제는 좀 손봐야 하나 싶을 때 가며, 네일숍은 사치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꾀죄죄는 아니지만, 나에게 돈 쓰는 건 아무래도 아끼게 되는 주부의 마인드랄까, 그냥 기본적으로 편안한 차림으로 다니게 되는 편이다. 엄마가 된 후, 나보다는 아이를 우선시하면서 아이에게 좋은 옷을 사 줄 지언정 나에게 쓰는 돈은 아끼며 살아온 세월이긴 하다. 거기에, 외모에 공들이는 것보다 정서적인 풍요로움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내 가치관이 더해져서 외모 가꾸는 것을 평가절하해 온 것도 사실이다.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네일숍은 주기적으로 가는 엄마들을 속으로 욕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인정하자. 나 역시 편협한 인간이었다는 것.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자각이 뼈를 때린다. 네일숍보다 책 한 권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내 외모에 들이는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는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거늘, 이 편협한 생각으로 누구를 욕했던 것인가. 나의 외모나 이미지로 내 가족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구나. 게다가 아이가 저렇게 울면서 들어오니 오해일지라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면서 느껴지는 흰머리나 기미 등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오늘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는 사실.

 

잠시 후, 다시 명랑해진 녀석은, 잔소리하듯이 말한다.


"그러니까 엄마, 미용실도 가고! 흰머리가 이제 보이잖아."


어이쿠! 안 그래도 너 개학하는 날이 엄마 머리하는 날이다, 이 녀석아!

경제생활을 하지 않는 주부의 위치에서 피부과에 거금을 들이는 것은 쉽지 않는 결심이었다. 점점 환해지는 피부빛을 느끼면서도 나에게 쓰는 돈이 곱지 않게 보이는 것은, 아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난 세월 동안의 가치관과 나를 가꾸는 데 인색했던 나 자신이 만들어낸 편협한 색안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사건은, 나에게 그 색안경을 이제는 좀 벗어던지라고 나에게 투자하는 돈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느낌이랄까. 그 꼬마 녀석의 한마디가 이런 생각을 일깨워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오랫동안 망설이던 피부과였는데, 큰맘 먹고 큰돈 들여 기미 치료 시작하길 정말 잘했구나. 물론 그 과정에서 할머니라고 오해받는 오늘의 사건이 벌어지긴 했다만, 엄마의 외모는 우리 가족의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좋았어! 나한테 돈 쓰는 것을 아끼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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