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과 팔이 망가지고 있다.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
종종 허공에 왜 이러냐고 욕도 한다.
요통은 고질병이라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데,
손목과 팔꿈치에 고장이 생기면서 무겁든 가볍든 물건을 들 때마다 통증이 동반된다.
주말 아침 대중목욕탕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주 중에 쌓인 스트레스와 떼를 벗겨내는 일은
통증 많은 중년의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다 떼를 벗겨내기 전 마지막 온탕 입수 때,
통증 부위마다 약한 전기 감전과 같은 묘한 찌릿함이 전달된다.
목욕탕을 나와 근처 커피 체인점에서 블루베리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하고, 땀이 삐질삐질 옷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커다란 컵에 한가득 담긴
스무디를 받아 든다. 아이고. 손목이야. 얼른 왼손으로 컵을 옮겨 든다.
제길. 목욕으로 데워진 몸과 일로 찌든 마음을 달고 시원한 것으로 달래려 했더니,
이게 무슨 고통을 동반한 달콤함이더냐.
중학생 때부터 문구를 좋아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시내나 대학로를 갈 일이 있으면
문구가 가득한 서점이나 문구 전문점을 방문한다. 여전히 그곳은 내게 천국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메모하는 습관이 그 시작이었다.
요즘 자격증 공부하고 있는데, 최근에 무겁고 비싼 샤프들이 손목에 무리를 주게 되었다.
필기감이 좋고 묵직한 독일 샤프는 더이상 1순위가 이니다. 이제 비싼 필기구들은 캄캄한
필통에 갇혀 기약 없는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써온 필사 노트를 종종 보는데, 노트 마다 필체가 다르다. 가장 최근 노트의
필체는 힘도 일관성도 없다. 내 오른손은 병가가 필요하다.
고단한 삶을 달래는 소소한 기쁨이 나이와 일의 중량에 쥐포처럼 납작해져 버리는 순간,
내 인생도 저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글플 때가 있다.
이제 뭘 애써 하려 말고, 고요한 침묵을 통해 세상을 관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늦지 않았고, 나는 젊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기대어
다시 활기를 불러일으킬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야 하는가?
벌써 가을이 다가 온다. 시간이 참으로 빠르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 대며 증언 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김 훈, 에세이집 "연필로 쓰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