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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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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Feb 20. 2022

부탁의 어려움(1)


어린 시절에는 부탁할 일이 없었다. 뭐든지 스스로 하길 원하기도 했고. 부유한 축에 속했던 유년기라.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어렸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지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사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런 것들을 사 주셨고. 이상하리만큼 떼를 쓰거나 길거리에서 울고불고 한 일도 없었다.


어린아이 치고는 눈물이 적은 편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어린아이로서 받는 보호를 다정하고 따뜻하게 여긴 게 아니라. 답답해했다.

또래 친구들을 정신 산만하고 번잡스럽다고 생각한 걸 보면. 1. 내가 정상적인 어린이가 아니었던지. 2. 정신연령이 조금 높았던 건지. 3.‘잘난 척 인자’가 몸속 깊이 박힌 채 태어났던지.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정상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려나.


이상하게 다른 친구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나쁜 의미로 무시를 하거나, 못되게 군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별로 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친구가 다가와서 사탕이나 과자를 내밀면. “난 됐어.”라고 말한 뒤. 조용한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지금 와서 그때의 기억에 대고 ‘그래. 그건 식성의 문제였어. 나는 사탕이나 과자를 좋아하지 않잖아.’ 하고 합리화하려 해도 또 다른 정황들이 당황시키고 만다.


내가 다닌 유치원에서는 교실 각 구역마다 놀이 섹션이 나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책이 잔뜩 꽂혀 있는 곳은 독서코너. 블록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은 블록 코너. 소꿉놀이 세트가 있는 곳은 소꿉놀이 코너. 여러 가지 리듬악기가 있는 곳은 음악코너. 이밖에도 과학코너. 무슨 코너.. 뭐가 많았는데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름도 좀 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코너 이름을 가졌었겠지.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독서코너에서 책만 읽던 애였다. 겉도는 나에게 선생님은 걱정 어린 눈으로- 왜 다른 놀이 코너는 가지 않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마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줄 아셨던 것 같다) 처음엔 ‘저는 책 읽는 게 좋아요.’라고 대답했지만. 계속되는 관심에 억지로 이곳저곳에서 시간을 때웠다. 다른 코너는 정말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걱정을 덜기 위해- 제법 다양하게 이용했다.

음악코너만 빼고.


선생님은 엄마에게 내가 음악코너에서 노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왜 음악코너에는 가지 않냐고 물었다. 한창 피아노 학원에 신나게 다니던 때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음악코너에서 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계속되는 추궁에 입을 열었다.

 

-냄새가 심해.

 

“뭐라고?”

 

-멜로디언 호스 부분. 입으로 부는 부분에서 심각한 냄새가 나.

토할 것 같아서 안 가는 것뿐이야.

 

“어머. 그런 거였니? 그런 거였음 선생님께 말을 하지.

엄마가 당장 선생님께 말해야겠다."

 

그 일이 있은 후. 선생님께서는 유치원의 모든 장난감을 수거해서 깨끗이 닦은 후에 햇볕에 말리셨고. 멜로디언 이라든지 입이 닿는 놀이기구는 이틀에 한번 꼴로 소독을 하셨다.

나는  모든 과정이 피곤했다. (선생님이 괜히  때문에 귀찮게 됐군. 이라면서) 그러면서도. '아니. 다른 애들은 냄새를  맡나? 어떻게 그렇게 고약한 곳에다 입을  수가 있지.' 라고 생각했었다. 음악코너에서 멜로디언을 연주할 .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와서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연주하는 멜로디언의 다른 건반을 이곳저곳 눌러 대는  싫었다. 멜로디언으로는 바흐 인벤션 심포니아를 연주할  없다. 알록달록한 음계 스티커가 붙여진 조악한 건반. '. 피아노 학원에 가면 훨씬 근사한 소리를 내는 녀석들이 있는데. 굳이 여기서 이걸 연주해야 하나.' 그래서 음악코너는 냄새 문제가 해결되어도  다른 이유로 피하게 되었다. 솔직히 여러 사람이 같이 입을 대고 침을 공유하는 시스템도  견디는 일이었다. 이런 납득할 만한 상황이 아니어도. 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친구들을 이해할  없었다. ‘만들기 시간 그려진 선을 따라 똑바로 오리기만 하면 되는 .  이렇게 삐뚤빼뚤. 잘라서는 안될 곳들을 자르는 거야? 포크질도 못해서 급식시간마다 음식을 바닥에 질질 흘려대는 거야. (나는 가위질이나 젓가락질에 소질이 있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나 색칠을  따라 하는 건데. 얘네들은 누굴 따라 하는  자존심 상하지도 않나. 우유 먹다 쏟아. 바지에 오줌 . 툭하면 울고불고. 시끄럽고 피곤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내고 위험한 행동도 하지 않으니까. 편했을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무서웠을  같다. 어린아이는 서툴고 실패하는 모습에서 애정이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나는 편하긴 했지만. 그다지 애정이 샘솟는 어린이는 아니었을 거란 얘기다.


또 한 번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걱정이 된 엄마가. 생일날 유치원의 모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성대한 나의 생일파티를 위해. 며칠 전부터 집을 꾸미고. 장을 보고. 맛있는 음식과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만들었다. 아마 속셈은 음식과 장난감으로 친구들의 환심을 산 뒤. 내 딸과 친하게 지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나 엄마가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이 넘쳐나는 공간에 나는 없었다. 그날 나는 친구들을 피해 엄마의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엄만 아직도 이때의 얘기를 하곤 하는데- 당시의 황당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일의 주인공은 방에 콕 틀어박혀 있고. 내 방. 내 침대. 내 장난감. 거실. 온통 친구들이 신나게 즐기게 된 파티였다. (엄마에게는- 다수가 행복했으니 됐다고 맞받아쳤는데. 그러자 엄마 대답 : 난 내 딸이 행복한 게 훨씬 좋다고!) 엄마는 행복의 정의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 답지 않은 게 아니라. 어쩌면 가장 어린이답게 유아적인 사고를 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던 유년기. 숫기가 없어서 낯가림이 심했던 유년기.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유년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라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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