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금 특별한 이력이 있는데.
고등학교 때 밴드에 있었다. 교내 밴드부는 아니었고. 21~23살 언니 오빠들이랑.
처음부터. '밴드를 할 거야!' 하는 마음은 없었다. 우연히 친구의 오빠가 몸담은 밴드의 연습실에 갔다가. 살아생전 본 것 중에 몇 안 되는 멋진 광경을 목격한 것.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본 멋진 광경은 잘생긴 남자의 연주가 아니었다. 겉가죽에 빼앗긴 얄팍한 마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반하는 순간.
어떤 여자가 베이스 솔로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솔로가 아니었다. 드럼도 연주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멋져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언니밖에는 안보였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삭제됐다. 코피를 쏟을 만큼 충격적으로 멋졌다. 내가 이 멋진 언니가 몸담고 있는 밴드와 같이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의 나'덕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바이올린을 했는데, 특별활동을 선택할 때. 여자아이들은 발레나 플룻. 남자아이들은 바이올린. 같은 공식이 있던 때였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발레를 시키려 갖은 애를 다 썼다. 사립초등학교에는 다양한 수업들이 있다. 억지로 끌려간 발레학원에서도 내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발레 하기 딱 좋은 체형이라는 둥. 예쁜 몸매를 가지게 된다는 둥 학원 원장님의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분홍색 쫄쫄이 스타킹과 발레복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넘어갔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다.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눈에 비친 발레학원의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바보들처럼 보였다. 지금은 발레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엄마의 노력과 발레학원 원장님의 설득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다음 관문은 플룻을 거절하는 일. 은색의 반짝거리는 악기는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기다란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리도 예쁘지 않았다. 여러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플룻의 소리는 아름다웠지만. 이상하게 혼자 내는 소리는 멋이 없었다. 화려한 외관만큼 소리가 날카로워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같은 곳에 입을 갖다 대는 행위가 싫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결벽증이 있었던 걸까?) 바이올린을 하고 싶었다. 나뭇결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곡선과 따뜻한 색깔을 가졌지만 소리는 날카롭고 예민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피아노도 플룻도 '이걸 누르면 도' '이걸 누르면 솔' 초보자가 쉽게 음계를 짚을 수 있는 구조라면. 바이올린이나 기타같이. 연주하는 것 자체만으로 고수의 느낌을 내는 현악기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피아노의 즐거움을 알아냈으니. 바이올린의 즐거움도 알아내야겠다는 예술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테스트를 받고. 포지션을 부여받는 시스템이 짜증 났지만. 송진 냄새. 현을 긋는 활의 움직임. 굳은살 박인 손가락. 비브라토의 떨림. 나의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 여러 악기가 만들어내는 하모니. 그 멋진 것 안의 나. 바이올린을 좋아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살부터 19살까지 1년 조금 넘게 밴드를 했는데. 내 인생에서 꼭 7~8년 했던 것 같은 무게감이다.
멋진 언니가 있는 밴드는 곧 있을 공연에서 바이올린 연주자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밴드 무대에 서는 일이 두려웠으나 (특히 리허설할 때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보는 일이 곤욕이었다.) 멋진 언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것은 기회다. 하늘이 나에게 주신 기회. 발레도 아니고 플룻도 아니고 세상의 많은 악기들 중에 바이올린을 택한 나 자신이 대견했다. '밴드랑 같이 무대에 서려고 바이올린을 했던 거였어.'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렇게 세션으로 참여해서 바이올린을 두세 번 연주하고 나니까. 밴드에서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바이올린은 특정 곡에만 필요했고. 모든 밴드 무대에 함께 있을 수 없었으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밴드 매니저를 자처했다. 매니저라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멤버들이 나를 매니저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불러주지도 않았다. 미성년자인 나는 혼자 연습실에서 뒹굴 때가 많았고. 언니 오빠들은 연습하는 시간보다 술을 마시러 다닌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럴 때면 주인 잃은 악기들을 맘대로 만져보고. 친구 K를 데려와 내가 아는 노래들을 이것저것 설명했다. 괜히 멋진 사람들 틈에 끼고 싶으니까. '매니저'라는 그럴싸한 호칭을 갖다 붙였다. 3개월 정도 밴드의 연습실을 청소하고. 공연을 따라다니며 악기 튜닝이라든지. 라인 같은 것들을 연결하고 앰프를 점검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새로운 곡을 작곡하던 어느 날이었다. 밴드 오빠들은 작곡이나 편곡을 시시때때로 했는데. 여기까지 맞춰보자. 하고 연주하는 소리를 무심코 듣다가. 아. 여기쯤에선 건반이 들어가면 좋을 텐데. 싶었다. 밴드의 구성원은 드럼. 기타. 베이스. 보컬 네 명이었다. 건반은 없었다. 나는 묻지도 않고 그들이 연주하는 소리 위에 건반 소리를 얹었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떤 확신 같은 게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서 건반을 연주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이후에 나는 밴드에서 건반을 치게 됐다. 처음 밴드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날.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날이라며 앞으로의 생일은 오늘일 것이라 공표했다.
재밌고 멋진 시간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듣고 바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나였다.
아주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커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재도 아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몇 년간 배웠으면서도 이론은 몰랐다. 악보를 보는 일이나 음표, 박자는 능통했으나. 화성학이라든지 대위법을 자세히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설명하기 힘든 방법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장조 단조 마음대로 오갈 수 있고. 화음도 넣을 수 있는데. 정확히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밴드 멤버 중에 화성학을 아는 사람은 기타를 연주하는 오빠 밖에는 없었다. 대학생도 그 오빠 혼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나는 그냥 어린애였다. 작곡 프로그램을 전혀 다룰 줄 몰라서. 연필로 악보를 직접 그렸다. 원시적이고 바보 같기도 했지만. 그게 꼭 모짜르트 같다고 여겨져서 그마저도 즐겁고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