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그에게 천천히 스며들다.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나는 내심 당황했다. 영화 DVD와 책이 가득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소파에 줄지어 앉아 있는 파스텔톤의 캐릭터 인형들이었다.
이 나이의 남자가, 그것도 인형을...? 그때 나는 그를 조금씩 알아가던 중이었고, 인형들은 그를 향한 호감이라는 풀악셀에 급작스런 제동을 건 계기가 되었다.
혹시... 인형을 좋아하는 변태... 인가?
처음엔 그런 엉뚱한 걱정까지 들었다. 그에게 마음을 더 주어야 할지, 말지 갈림길에 서 있던 나에게 그 인형들은 작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그의 소년 같은 마음을 조금씩 마주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말과 감정을 세련되게 다듬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오해할 때면, 나는 며칠이고 혼자 고민했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 되는 걸까.
하지만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그의 순수한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결국 나의 편견이었다는 것으로 내 고민은 종지부를 찍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로 했다.
그는 인형처럼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남자다. 길을 가다가도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보면 멈춰 서서 “너무 귀엽다”라고 말하며 한참을 바라본다. 보통의 남자들과는 조금 다른 취향.
그는 근육키우기나 자동차보다, 작은 곰인형을 좋아한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젠 그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물론, 그가 나보다 어려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그토록 갖고 싶던 인형 하나 없이 자랐다. 그래서인지 인형을 볼 때마다 큰 감흥도, 애착도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집에서 처음 마주한 인형들은 내 안에 오래된 감정을 건드렸다. 처음엔 이상하고 낯설기만 했던 그것들이, 어느새 내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허기를 따뜻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나와 그의 생일은 하루 차이다. 그가 하루 먼저, 내가 그다음 날이다. 올 해로 우리는 두 번째 생일을 함께 맞았다. 그의 생일 선물로 나는 곰인형을 떠올렸다. 평소 그가 “이걸 침대에 기대고 영화를 보면 너무 좋겠다”며 갖고 싶어 했던, 그의 몸만 한 큰 곰인형.
그가 그 인형을 받았을 때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싱글벙글, 아이처럼 행복한 얼굴.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를 알게 되었다.
나 귀여운 남자 좋아하는구나!
오래전 본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속 어떤 신비한 여자가 말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Keep your childish innocence.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렴.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는 어른이니까”라는 말로 정말 좋아했던 것들, 마음을 설레게 했던 취향들을 하나씩 포기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도대체 ‘어른스럽다’는 건 뭘까. ‘유치하다’는 건 또 무엇일까. 때로는 유치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다시 꺼내주는 건 아닐까?
나는 이제, 내 유치한 마음조차도 드러내고 안아주며 살아가려 한다. ‘어른이‘가 되어 살아가는 삶.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우고 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과 습관, 말할 수 없는 비밀조차도 함께 존중해 주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인형 하나를 조심스레 안아주는 법을 배워간다.
그것은 어쩌면,
어른이라는 외피를 입고도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우리의 인간다움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기억하는 어른은 드물다.”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