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왜 나는 엄마와 내 사진을 찍지 않았던가

by Miyuki

언젠가 TV에서 본 한 여자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연애 프로그램이었던가, 정확히는 모르겠다. 맑고 어린 얼굴의 그 애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꽃이 왜 예쁜지 알아요?” 그러곤 말했다.

“언젠가 질 거니까 그래서 예뻐 보이는 거예요.”


막 스물을 넘긴 아이의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꾸며내지 않은 듯, 조금은 서툰 말투였지만 어쩐지 그 말은 오래도록 내가 품어 온 질문을 건드렸던 것 같다.

벚꽃 소식이 들려오자 설렘으로 한껏 마음이 들떴다. 꽃이 금방 질 거라는 소식에 급히 달려간 어느 3월의 끝자락, DC의 거리에는 꽃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들로 북적였고, 꽃잎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누군가는 미소를 몇 번이고 다듬었다. 나는 그저 벚꽃만 찍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거기엔 내가 없었고, 내 곁의 누구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그랬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내게 뭔가를 고르는 일이었다. 마음에 남길 만한 것, 눈에 담아두고 싶은 것. 그런데 그 선택 속엔 언제나 내가 빠져 있었다. 엄마도 그랬다. 왜일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내 사진첩 속엔 그날의 식사, 고양이들, 우연히 멋지다고 느낀 풍경들로 가득하다. 내가 남긴 기록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들은 내가 ‘아름답다’, ‘소중하다’, ‘기억하고 싶다’고 느낀 대상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리고 왜 엄마는 거기 없을까.

그 질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중심엔 늘 ‘엄마’라는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엄마와 살가운 관계를 맺지 못했다. 이유는 많겠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엄마와 나는 너무 달랐다. 엄마는 철저히 현실적이고 결과 중심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감성적이고 섬세한 아이였다. 단 한 번도 우리는 어떤 주제에서도 의견이 맞았던 적이 없었고, 나라는 존재는 늘 ‘틀린’ 쪽에 서 있었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딸이라는 마음은 내 안에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믿음 없이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됐다.


그래서일까, 내 사진도 없지만, 엄마의 사진도 없다. 기록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이 그만큼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소녀의 얼굴과 세월을 머금은 지금의 내가 겹쳐 보인다. 변화하는 계절에 나를 맡긴 채 살아온 시간이 보인다. 엄마와 나의 계절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


나는 엄마와 화해하고 싶었던 걸까. 화해라는 말은 너무 크다. 그냥,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던 걸지도. 그런 날이 올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엄마와 나, 그 오랜 오해의 계절에도 아직은 피지 못한 어떤 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 나누지 못한 기억들, 닿지 못한 손끝이 언젠가 봄볕 아래에서 서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까.

​​​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한겨울의 깊은 곳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꺼지지 않는 여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In the depth of winter,
I finally learned that within me
there lay an invincible summer.​


계절은 반드시 바뀐다. 겨울은 지나가고, 봄은 다시 온다. 관계도, 마음도 그렇게 한 계절을 통과하며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에 아직 봄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 엄마와 나 사이에 진짜 봄이 올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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