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리투아니아에서 맞는 첫 겨울을 앞두고, 잠시 와계시던 부모님과 함께 1박 2일로 클라이페다(Klaipeda)와 팔란가(Palanga), 샤울레이(Siauliai)를 돌아보는 렌터카 여행을 했다. 클라이페다는 유일한 항구도시이고 팔란가는 유일한 해변 휴양도시이며, 샤울레이는 십자가 언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카우나스에서 클라이페다까지는 고속도로로 두 시간이 걸린다. 발트 국가 중 해안선 길이가 가장 짧은 리투아니아에서 무역 및 군항으로 쓰이는 귀한 항구도시이다. 바다와 통하는 둘도 없는 통로이니 리투아니아 경제에서 위상이 크다. 고속도로는 카우나스와 빌뉴스까지 이어지는 유통망의 중심이라 트럭 행렬이 밤낮없이 이어진다. 다행히 왕복 4차선이라 추월이 수월하지만, 트럭이 너무 많아서 계속 1차선을 오락가락해야 한다. 차라리 계속 1차선으로 달리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추월하면서 평균 120킬로 정도로 달리면 2시간 만에 클라이페다 바닷가에 도착한다.
클라이페다 지역은 항구와 해안을 낀 작은 영역이지만 종족적, 문화적으로 리투아니아에서 특이한 지역이다. 중세 이래 1차 대전 시기까지 독일 영향권이었기에 건물 모양, 문화, 언어도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클라이페다 남쪽으로는 뜬금없이 러시아 영토가 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해안 사이를 베어 문 듯이 자리 잡고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 지역은 옛 독일 프러시아의 주요 도시였다. 예전 이름인 쾨니히스베르그(Koenigsberg)가 더 익숙한데, 칸트의 무덤이 있고, 유럽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클라이페다도 13세기 중반부터 독일 튜턴 기사단의 거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발트 해안을 따라 형성된 한자동맹 네트워크의 거점이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의 대공국이 강성했던 시절에도 여전히 튜턴 기사단 영역이었고, 프러시아의 지배로 이어졌다. 독일어 사용, 루터교회 승인 등 내륙 리투아니아와는 달리 독일식 질서와 문화가 자리 잡았고, 프러시아 가장 동쪽의 항구로서 무역과 산업이 발전하였다.
러시아, 스웨덴 등 강국들이 발트 지역 장악을 놓고 전쟁과 부침이 있었지만 클라이페다를 포함한 쾨니히스베르그 주변은 프러시아 영향권으로 유지되었다. 리투아니아가 19세기 러시아 제국 지배 하에서 리투아니아어 사용을 금지당했던 시기에는 클라이페다에서 리투아니아어 책을 출판해서 밀수로 유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리투아니아와 독일 문화가 공존하던 클라이페다는 1차 대전 후에 완전히 리투아니아 영토가 되었다. 주민들 상당수가 독일에 더 친화적이어서 반발도 많았다고 하고, 독일 역시 미련이 남았던 항구였다. 그래서인지 2차 대전이 제대로 불붙기도 전에 히틀러가 재점령하고 방문하기도 하였다. 나치가 후퇴하고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는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독일로 떠나버려 고작 50여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복잡한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클라이페다는 너무 부침이 심했던 나머지 파괴도 극단적이었기에 관광할 거리가 많지 않다. 2차 대전 때 완전히 파괴되고 독일계 주민들도 사라진 항구는 소련의 가장 서쪽에 자리한 부동항이었다. 소련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백을 메웠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가장 많은 리투아니아 도시가 되었다. 조선업, 수산업 등 경제적 목적으로 개발하면서 문화적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 역사 유적을 복원하고 있어서 카우나스처럼 깔끔한 새 성채 유적도 있는데 아직은 공사 중이다. 공사 중인 성채 유적에 박물관이 딸려 있어서 발굴된 유물과 그림, 사진을 통해 빌뉴스나 카우나스와는 또 다른 리투아니아 제3의 도시 클라이페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성채보다는 해안을 따라 조성된 항구가 볼만 했다. 부산이나 인천에 비하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규모지만, 크레인도 줄지어 있고 컨테이너선, 유조선도 보여서 그저 평원뿐이던 내륙 경치와 확연히 다른 역동성이 있다. 여름에는 옛 한자동맹 시절의 무역로를 따라 범선 항해를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몇몇 범선 체험을 하는 젊은 팀들이 보였다.
클라이페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클라이페다 도시보다는 항구에서 페리선으로 5분도 안 걸리는 맞은 편의 큐로니안 사구(Curonian Spit)를 향한다. 우리도 클라이페다는 잠시 거쳤을 뿐 곧바로 페리에 차를 싣고 국립공원으로 관리하는 사구에 들어갔다. 지도상으로 굉장히 특이한 지형이다. 클라이페다를 천혜의 항구로 만들면서 길게 형성된 사구는 칼리닌그라드까지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다. 거기서 다시 폴란드의 그단스크까지 마치 늘어난 피자치즈 걸치듯 이어져 있다. 러시아 국경으로 끊어져 있지만 않았으면 폴란드까지 해안을 따라 막힘없이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갔기에 큰 기대 하지 않았는데, 적당히 차를 세우고 올라가 본 사구의 풍경은 감동적일 만큼 멋있었다. 이미 11월이어서 바람이 세고 추웠지만, 마침 맑았던 날씨 덕에 거의 완벽한 서향의 해안으로 넘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발트해를 하얗게 빛내고 있었다. 길게 뻗은 사구의 안쪽은 방풍림을 조성해서 울창한 숲이었지만, 발트해를 향한 바깥쪽은 완벽한 모래 사구 그대로다. 여름이면 수십 킬로미터가 천연 해수욕장이 될 모양이었다. 바람이 만드는 모래 위 무늬와 완만한 해안을 따라 밀려들고 나가는 발트해의 파도가 멋진 풍광을 만들어냈다. 초겨울이라 사람이 전혀 없어서 그 경치를 온전히 우리끼리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