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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1. 2018

기본 관광 코스: 빌뉴스와 트라카이

2017년 9월 15일

삼십자가 언덕에서 내려다본 석양 무렵의 빌뉴스 구시가지. 멀리 TV탑까지 보인다. 

리투아니아를 처음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촉박한 여행 기간에 따라 빌뉴스만 하루 돌아보거나, 한 나절 정도 더 들여서 트라카이까지 둘러보거나, 더 길면 카우나스까지 들러서 구시가를 거닐어 본다. 여름 시즌부터 추석 연휴 정도까지는 카우나스 구시가지에서도 한국인 단체 관광팀을 간간이 보곤 한다. 기본 관광으로 빌뉴스와 카우나스는 구시가지 거리로 쭉 걸어가면서 핵심적인 건물과 예쁜 골목 몇 군데만 들어가 보고 외관을 구경한 뒤 잠시 쇼핑을 한다. 트라카이는 호수 한가운데 섬에 재건한 성채이므로 박물관이 된 성채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본 뒤 호숫가에서 식사나 휴식을 하는 게 기본이다. 

빌뉴스 구시가지 관광의 시작, 옛 성문 '새벽의 문' 성당

체류 일 년이 넘어가면서 이제 ‘우리 동네’가 된 카우나스의 구시가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운동 삼아 산책하는 코스가 되었다. 빌뉴스는 몇 주에 한번 정도 주말에 방문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날씨가 무난한 날이면 빌뉴스 구시가를 산책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빌뉴스 구시가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카페 탐방을 했는데, 확실히 카우나스보다 다채롭고 모던한 카페가 많이 들어서고 있다. 트라카이는 그야말로 전천후 관광지이다. 날씨 좋을 때는 주민들도 요트나 카약, 수영, 피크닉 등을 목적으로 많이 가는 곳이지만, 날씨가 별로인 날은 관광객만 보인다. 1년쯤 지나니 생활 영역과 관광 영역이 구별이 되었다. 첫 해에 동생이나 부모님이 방문했을 때는 나도 아직 관광객 느낌이어서 좌충우돌이었다. 손님이 왔을 때 기본적인 관광을 효율적으로 끝내고 여유를 즐기게끔 배려하는 현지 가이드 역할은 일 년 정도는 지나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빌뉴스 관광의 핵심 대성당 광장. 여름에는 각종 행사와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빌뉴스는 수도답게 규모도 훨씬 크고, 관광지 분위기도 잡혀 있었다. 물가도 카우나스보다는 대부분 더 비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울 같은 대도시는 전혀 아니고 유럽의 소도시 정도다. 한국식의 효율적인 관광이라면 반나절이면 다 돌아볼 것이다. 외곽에는 유리로 입힌 고층빌딩들도 있지만, 처음에는 나도 관광객이었기에 구시가를 중심으로 중세 분위기를 내세운 지역만 도보로 몇 차례 구경을 다녔다. 리투아니아에서 빌뉴스가 독보적으로 큰 도시라 해도 구시가는 역시 아담하다. 


‘검은 머리 성모’가 유명하다는 새벽의 문을 들어서면 돌로 깔린 길이 시청사 광장을 지나 대성당 광장까지 이어진다. 성문 위의 작은 성당에 있는 검은 머리 성모 초상화는 올라가서 자세히 보면 얼굴이나 머리가 검은 게 아니고, 나무에 그려진 얼굴 부분이 금은으로 장식된 옷과 후광에 비해 어둡게 보여서 마치 검은 색인 듯 느껴지는 것이다. 성문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호를 긋거나 깊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가톨릭 국가답게 이 성문 위 성당부터 시작해서 구시가 길 양쪽으로 성당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빌뉴스는 러시아 인구도 많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도 곳곳에 섞여 있어서 마치 건물 하나 건너 하나씩 성당인 듯이 느껴진다. 그 사이사이에 호텔과 식당, 기념품점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큰길은 단순하지만 골목은 상당히 다채롭다. 숱한 부침의 역사를 가진 다양한 성당과 교회가 눈 가는 곳마다 있다.

기본 코스는 시청사 광장에서 한 번쯤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은 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게토가 있던 옆길로 접어들어 내려가 빌뉴스 대학을 먼저 구경하거나, 그대로 큰길로 내려가 대성당 광장을 보는 것이다. 입장 시간이 빨리 끝나는 빌뉴스 대학을 먼저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처음 방문했을 때는 이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대학 내부를 보지 못했었다. 고색창연한 도서관까지 보려면 제한된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대학 내 채플인 세례 요한 성당이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이지만, 학교를 일부러 관광 올 정도로 관심이 있다면 따로 시간을 맞추고 비용도 더 내야 하는 도서관이 더 보람찬 구경거리다. 채플 옆에 별도로 높이 세운 종탑까지 올라가 본다면 이 대학 구경에도 꽤 시간이 걸린다. 

빌뉴스 대학교 내 채플은 콘서트도 많이 열린다. 인문학 강의동 내 프레스코화는 발트의 사계절과 신화적 소재로 유명하다.

구시가 중심 거리 끝에 나타나는 대성당 광장에는 말 그대로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큰 대성당과 그에 바로 연이어 최근에 재건을 완료한 ‘대공의 궁전’이 있다. 대성당은 지금도 미사 때마다 꽉 차는 성당이고, 대공의 궁전은 역사박물관이다. 유물이나 볼거리보다는 사진을 곁들인 세세한 설명을 읽어야 해서 내부 관람은 관광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공부할 작정으로 혼자 들어가서 3시간에 걸쳐 다 읽은 적이 있는데,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고역일 듯했다. 모두 하얀 건물인데 별로 장식성이 없이 거대해서 지금까지 걸어온 오밀조밀한 구시가 거리의 이미지와 매우 대조적이다. 그 앞에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처럼 게디미나스(Gediminas)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데, 거대한 성당 건물 때문에 매우 작아 보인다. 그 발치에 강아지처럼 조각된 ‘철갑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에 빌뉴스를 세웠다는 장군이다.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넓은 광장은 각종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곳이고, 연말 시즌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도 이곳에 선다. 여름에는 야외 그릴이 있어서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공연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빌뉴스를 건설했다는 게디미나스 대공 동상 뒤로 '대공의 궁전' 역사박물관이 있다. 대성당은 별도로 세워진 종탑이 유명한데, 의외로 가파르고 불안해서 스릴이 넘치는 계단이 있다.

대성당 광장 뒤로 강변에 우뚝 솟은 언덕이 있다. 걸어서도 금방 올라가는 언덕인데, 워낙 평평한 지형이다 보니 독보적으로 높아 보인다. 꼭대기에 원래 성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망루 하나와 건물 일부만 재건되어 있고, 그 이름도 게디미나스 성채이다. 그래도 조금 높은 언덕이라고 뒤쪽으로 푸니쿨라가 있는 덕분에 1분 만에 올라갈 수도 있다. 2016년에 처음 왔을 때는 이걸 타고 올라갔었는데, 그해 초겨울부터 2018년이 되도록 이 푸니쿨라는 작동을 하지 않았다. 너무 봉긋 솟은 흙 언덕이라 경사면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는데, 푸니쿨라도 안전상의 이유로 보수 중인 것 같다. 그냥 걸어서 올라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일단 올라가면 빌뉴스 구시가는 물론이고 강 건너의 신시가까지 죄다 내려다보인다. 딱히 랜드마크는 없지만 평평한 지형과 깨끗한 공기에다, 맑은 날씨까지 겹치면 탁 트인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1989년에 무너져가는 소련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며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 탈린에 이르기까지 한 줄로 인간띠를 이은 시위가 있었다. 촛불과 노래로 대규모의 평화 시위를 해서 주목을 받았던 발트 3국의 그 ‘노래 혁명’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하다. 

대성당 뒤로 쌓아올린 듯 자리잡은 언덕 위 게디미나스 성채는 전망대 겸 작은 박물관이다. 1989년 인간띠 노래혁명의 시작점이다.
게디미나스 성채에서 내려다보는 빌뉴스 구시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중세도시 모습을 유지한다.
구시가지 동쪽으로 꺾어져 리투아니아 '문학의 길'을 지나면 예쁜 성안나 성당이 나온다. 단체관광팀들의 포토존이다.

이렇게 새벽의 문부터 시청사 광장, 대성당 광장, 빌뉴스 대학, 게디미나스 성채까지 봤다면 빌뉴스 구시가의 기본 관광은 끝난 것이다. 나폴레옹이 손바닥에 얹어서 가져가고 싶어 했다는 설이 전해오는 성 안나 성당을 보려면 잠시 옆 골목에도 다녀와야 한다. 그 외에도 구시가 거리 곳곳에 있는 예쁜 성당들 몇 군데까지 들러봤다면 매우 모범적인 관광을 한 셈이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 다녀야 하기에 하루 종일 다니면 꽤 다리가 지치는 코스이기는 하다. 

호수 가운데의 트라카이 성은 날씨가 나빠도 예쁘다. 

버스로 이동하는 단체관광이라면 바로 이어서 트라카이까지 보고 올 수도 있다. 전용 차량이 없다면 다음 날 따로 가거나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야 한다. 처음 구경을 다닐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았는데, 성채가 보이는 호숫가와 정류장이 꽤 멀다. 트라카이에 가는 대중교통은 시외버스인데, 터미널이 호수 바깥쪽에 있어서 성채 진입로까지 30분 가까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날씨가 좋다면 그 산책도 즐겁지만, 예측불허의 리투아니아 날씨는 비와 바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자동차가 있다면 바로 앞까지 들어갈 수 있다. 생각보다 저렴한 자동차 렌트 업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가족이나 지인이 올 때 아예 공항에서부터 렌트를 하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나면 끝없는 평원과 숲만 펼쳐지는 나라라서 드라이브 풍경은 단조로운 편이다. 그래도 도시 외곽에 있는 관광지나 공원, 트라카이처럼 의외로 대중교통 이동이 불편한 곳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트라카이는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달력이나 엽서에도 제일 많이 등장한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벽돌 성채는 계절별로 호수의 물빛과 주변 숲의 변화가 어우러져 동화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딱 그 풍경 하나지만, 악천후만 아니라면 누구나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아름다운 곳이다. 정주민은 거의 없는 휴양 마을이고 호숫가에 음식점이나 기념품점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래도 식사라도 하거나 기념품을 사면 관광지답게 빌뉴스보다도 물가는 더 비싸다. 트라카이 성 내부는 역시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리투아니아가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12세기부터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이 황금기를 이룬 15세기 정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빌뉴스의 대공의 궁전 박물관보다는 훨씬 시각적인 전시여서 어린이들도 눈길을 줄 만한 전시관이다. 성채 내부의 공터에서는 시즌에 따라 이런저런 역사 재현 이벤트도 있고, 활쏘기나 고문기구 체험도 있어서 우리나라 고궁 같은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트라카이 성은 가장 관광지 같은 관광지이다. 작은 성채에 전시와 체험행사도 꽤나 다양하다.

트라카이 방문의 초점은 성채 내부보다는 바깥의 호수 경치이다. 9월의 어느 늦여름 햇살이 절정인 토요일에 방문한 트라카이는 온 호수가 보트와 요트와 카약으로 가득했다. 노 젓는 크고 작은 보트와 서핑보드 수준의 카약까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호수가 바글바글했다. 노를 젓거나 카약을 탈 상황은 아니었기에, 7~8명은 탈 법한 요트를 함께 간 동생과 둘이 전세 내듯 해서 아저씨가 몰아주는 대로 1시간 정도 호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서울 한강에서 요트가 1시간에 12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났는데, 여기서 30유로 줬으니 4분의 1 정도 되는 가격이다. 눈부신 햇빛에다 각도에 따라 변하는 호수와 성의 경치가 그만이었고, 그 경치를 즐기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주말 분위기가 더욱 눈이 부셨다. 아직 외국 관광객들이 여기서 요트를 탈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바가지요금은 고사하고 체계적인 안전관리 시스템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 유원지처럼 자기 보트나 카약 가져와서 가족과 함께 타는 사람들이 더 많다. 현지인들과 동떨어져 외국인 관광객용 가격과 시스템이 따로 있는 경우를 많이 보다가 이런 생활 밀착형 유원지에서 즐기는 여행은 낯설 지경이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요트와 카약이 가득했다. 키비나이는 트라카이가 제일 비싸지만, 여기서 유래한 음식이라 결국 먹게 된다.

비타우타스 대공이 용병으로 초청해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는 타타르 인들의 문화가 남아 있는 곳도 이곳 트라카이라고 한다. 전시실에 타타르인들 문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 외에는 사실 그 자취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키비나이(Kibinai)라고 해서 전통식 패스츄리 속에 고기나 치즈를 넣어 커다란 만두처럼 구워내는 음식이 타타르 인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트라카이 말고도 리투아니아 어디에서나 팔고, 대형마트에서도 파는 음식이다. 늘 보던 키비나이를 좀 더 비싸게 주더라도 호숫가에서 한두 개쯤 먹으며 경치를 즐기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키비나이까지 먹고 나면 트라카이에서도 기본 관광은 끝낸 셈이다. 그 후로도 몇 번 가봤으나, 그 맑았던 늦여름 주말의 트라카이처럼 사람들로 넘쳐나는 친근한 유원지 느낌은 만나지 못했다. 모든 관광은 날씨가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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