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4일
리투아니아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장소를 꼽으라면 바로 샤울레이(Siauliai)의 십자가 언덕(the Hill of Crosses) 일 듯하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이고 리투아니아를 찾는 관광객들이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번쯤 들르고자 일정을 조정한다. 샤울레이는 빌뉴스나 카우나스에서 꽤 멀고 오가는 길이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여서 편도 3시간 가까이 걸린다.
사실 십자가 언덕 하나 보려고 다녀오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여정이다. 혼자라면 계속 미루었을 텐데, 부모님과 클라이페다 방문하는 여정에 끼워서 한번 다녀오고 이후 5월에 동생과 또 다녀왔다. 드물게 두 번이나 다녀온 한국인이 되었다. 샤울레이는 리투아니아에서 네다섯 번째 정도 규모가 되는 도시지만 시내에는 딱히 관광지가 없다. 외곽의 지방도로 옆길로 빠져나가면 평지에 갑자기 나타나는 작은 십자가 언덕에만 세계 각지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렌터카로 십자가 언덕을 찾아가면 최근에 만든 주차장이 있고, 기념품 상점과 관리사무소가 딸려있다. 거기서 멀찍이 떨어진 평원의 낮은 언덕에 고슴도치처럼 십자가가 잔뜩 꽂혀있는 언덕이 시야에 들어온다. 부모님과 처음 갔을 때는 순진하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유로의 주차비도 내고, 언덕을 향해 멀리서부터 걸어갔다. 성수기에는 반드시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비수기 한적할 때는 언덕 옆을 지나는 작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바로 접근할 수 있다.
5월 초 동생과 다시 갔을 때는 나도 경험을 살려 언덕 옆 길가에 차를 세웠다. 물론 십자가 언덕을 천천히 조망하면서 감상하려면 주차장에서부터 조성한 진입로를 따라 걸으며 접근하는 것도 좋다. 추운 계절엔 바람을 전혀 가려주지 않는 평지를 멀리서부터 걸어가기가 만만치 않다. 렌터카 없이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더 멀리 큰 길가에서부터 걸어서 진입해야 하는데, 상당한 의지가 필요한 순례길이다.
언덕이라지만 그다지 높지도 크지도 않다. 원래부터 십자가로 꽉 차 있어서 관리에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교황 방문 이후로 유명세를 타면서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십자가가 너무 많이 세워지고 있다. 작은 언덕이 십자가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언덕 아래 양 옆으로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길게 펼쳐져 사진에 다 담기가 어렵다. 언덕 위로는 너무나 빽빽하게 십자가가 들어차서, 줄이 쳐진 샛길로 겨우 지나다닐 수 있다. 대부분이 나무 십자가인지라 오래되면 쓰러져서 썩어가게 되는데, 그걸 치우는 일도 버거운 듯 여기저기 얽혀있는 십자가 무더기가 보인다.
길가에 가까이 꽂힌 십자가들은 모두 아주 최근 것들이고, 한글을 쓴 십자가도 자주 눈에 띈다. 한글뿐 아니라 한자, 일본어, 세계 모든 문자가 다 모인 듯하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표시하는 다윗의 별, 초승달 모양도 섞여 있다. 물론 대다수는 근처에서 가져왔거나 구입한 것이 분명한 리투아니아 나무십자가다. 리투아니아 십자가 특유의 조각 문양이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데, 거기에 사진이나 묵주를 걸거나 화려한 장식이 붙은 십자가가 많다. 화려하지만 비바람에 색이 바래서 좀 음침해 보이고, 치열하게 세웠지만 거미줄도 생기고 서로 얽혀 무너져가는 모습이 우울하기도 하다.
교황 방문으로 가톨릭 성도들의 세계적인 순례지가 되었으나, 가톨릭 신앙의 성지라고 하기에는 인간적인 의지가 강하게 배어 나는 민족의식의 상징에 가깝다. 리투아니아 민족의식이 드러나는 상징적인 장소로 알려지고 십자가가 늘어나면서 소련 치하에서는 여러 번 불도저로 밀렸다고 한다. 낮에 불도저로 밀면 밤에 다시 열심히 십자가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 과정에서 십자가 언덕의 상징성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민족정신의 상징이자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기원하는 열망의 표시가 되었다. 국민 대다수가 믿는 가톨릭 신앙이 전반적으로 압제를 받았으니, 십자가를 줄기차게 다시 세우는 행위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강한 의지를 담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기원을 담아 성황당에 돌무지를 쌓아 올리듯, 간절한 현세적 기원이 반영된 장소다. 종교적 차원에서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겠으나, 십자가를 세우는 행위를 통해 단합된 의지를 표시하고 기억하는 의미가 크다. 순수한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민족정신을 이어 가는 상징이자 독자적인 문화가 섞여있는 공간이기에 누구나 한 번쯤 와보는 특이한 방문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