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일
리투아니아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대략 한 달로, 11월 말부터 거리 장식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유럽의 기독교 국가 치고는 짧은 편이다. 어디나 공식적으로는 한 달 정도지만, 폴란드는 진작부터 거리가 온통 반짝이고 있고, 독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몇 주 전부터 성업 중이다. 11월 초 만성절이 지나자마자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심정에는 나도 어느새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10월부터 이미 햇빛이 드물고 밤이 길고 축축한 겨울이 깊어가는 중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밝히는 조명과 장식, 군것질 거리는 긴 겨울의 큰 낙이고 위로다. 겨울이 절반쯤은 지나가는 연말에 성탄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같은 장소도 전혀 달라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힘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주니 고맙기가 이를 데 없다.
독일 대도시마다 경쟁적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크리스마스 마켓’ 문화는 리투아니아에서는 좀 애매하다. 문화적으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트리 점등식을 하고 나면 광장에는 성탄절까지 오두막집 모양 부스들이 둘러서서 마켓이 생기기는 한다. 하지만 커피와 핫와인, 도넛, 쿠키, 캔디 정도의 지극히 가벼운 간식거리와 장식품, 소품을 파는 정도일 뿐이다. 소시지와 감자를 비롯한 먹을거리로 유원지 급의 흥겨운 축제 분위기를 내는 독일과는 다르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상업화된 축제라기보다는 종교적이고 가족적인 명절이라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의 성탄절은 철저한 가족 행사고 우리의 추석과 비슷하다. 미국과 달리 추수감사절이 없으니 하반기의 유일한 명절이고 칠면조도 이때 먹는다. 대가족 개념이 있어서 할머니 집, 즉 시골에 간다는 학생들이 많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 오후부터 성탄절 당일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은커녕 문을 여는 상점도 없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적잖이 당황한다. 유럽 많은 지역이 그렇지만, 그래도 서유럽 대도시나 관광지들은 몇 군데라도 영업을 할 텐데 이곳은 쇼핑몰까지 죄다 쉰다. 미리 식량을 사놓아야 굶지 않는다고 겁을 주었다.
물론 젊은 세대는 종교보다는 점점 연말 파티로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나이 든 어른일수록 전통에 철저하다. 고기와 우유를 먹지 않는 부분적 금식도 독실한 어른들만 지키는 것 같다. 그래도 생선과 야채를 주로 먹고 절제하는 게 기본이어서 굳이 고기를 열심히 찾지는 않는다. 작게나마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소시지나 꼬치구이 같은 고기 음식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금식 때문일 것이다. 전통을 잘 지키는 집일수록 이브까지 버티다가 성탄절 당일에 잘 준비해서 실컷 먹는다고 한다. 성당은 연중 가장 바쁘다. 원래 모든 성당에 아침저녁으로 기도회가 있으니 횟수가 특별히 더할 것은 없지만 참석자의 숫자가 달라진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수도인 빌뉴스의 크리스마스 마켓조차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는 아니고, 그저 트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선 부스에서 따뜻한 음료나 과자, 소품을 파는 소박한 마켓이다. 그래도 핫와인이나 따뜻한 미드(벌꿀 술)를 한 잔 사 들고 트리를 천천히 돌면서 구경하는 재미는 있다. 빌뉴스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성당 광장의 종탑을 따라잡을 듯 높이 세우고 자잘한 전구 줄을 만국기처럼 펼쳐놓고는 그 아래 둥그렇게 부스를 돌려세운다. 2016년에 에 빌뉴스의 크리스마스트리 구경을 갔다가 처음으로 대성당 앞의 종탑에 표를 사서 올라가 보았다. 트리도 있어서 전망이 예쁜 것은 좋았는데, 복원해서 깔끔한 외관과 달리 올라가는 계단이 아래가 훤히 보이도록 얼기설기 엮은 나무 계단이어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좁은 첨탑이 아니라 원통형에 가깝다 보니 허공에 계단을 만들어 세운 탓이다. 춥고 겁나는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기어이 종보다 더 높은 꼭대기에 이른다. 내려다본 빌뉴스 대성당 광장의 성탄 시즌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후였지만 이미 저녁 빛깔이어서 야경에 가까웠고, 거대한 트리의 전구와 가로등의 불빛이 모두 따스하게 보였다. 2017년도 빌뉴스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비슷한 디자인이었지만 핑크색과 은색을 섞어 더 예뻐졌다.
대성당 광장의 트리가 주인공이지만, 빌뉴스는 시청사 광장에도 조금 작은 트리와 마켓이 또 선다. 시청사 안과 밖을 모두 활용하는 큰 장터로, 빌뉴스에 주재하는 각 국가 대사관별로 부스를 만들고 전통음식이나 물건들을 팔면서 국제 바자회 비슷하게 운영한다. 아쉽게도 한국대사관은 없기 때문에 부스도 없다. 성황을 이루는 일본과 중국 부스를 보면서 부러워할 뿐이었다. 한류 팬들도 많으니 우리나라 부스가 있다면 상당히 인기가 좋을 텐데, 아제르바이잔이나 이란까지도 꽤 큰 부스를 만들고 민속무용 공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수만 쳐 주었다.
물론 독일 영향권의 어느 지방 도시를 가도 리투아니아보다는 훨씬 화려하고 큰 마켓을 구경할 수 있다. 그래도 빌뉴스의 거대한 트리 주위를 단정하게 한 겹 두른 마켓과 그보다도 더 작은 카우나스의 마켓은 어느새 ‘우리 동네’의 조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는 정겨운 장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