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의 것은 내게 씌우지 마세요.
1.
오늘은 무슨 상상을 쓸거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하얀 공백만이 있다. 낮에 '그래, 오늘은 이거다!' 킵해놨던 생각은 역시 밤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없다. 배신자. 그래도 계속해서 열심히 짱구를 굴려보니 문득 예전에 했던 생각 하나가 두둥실 떠오른다.
'난 이 세상에 나이가 없으면 좋겠어'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는 나이라는 게 없는 편이 더 낫다. 있어서 좋은 점을 생각해봐도 오 분째 떠오르지 않는 거 보니 이거 글로 써도 될 것 같다.
너가 아직 젊어서 모르는 거야, 어디선가 라떼는 말이야족이 소곤거린다. 미안하지만 해마다 안 죽고 버텨 저절로 얻은 나이로 훈수 두는 꼰대. 너도 사실 나이 먹는 거 싫은 거 다 알아.
자꾸 동네북처럼 나이 물어서 손가락 피기 귀찮은 3살 꼬마도, 20대 청춘인 나도, 50대 우리 엄마 아빠에게도 사실 나이가 별 필요 없다는 것. 특히 인간관계에서 아주 방해만 되는 애물단지다. 나이가 없으면 오만과 편견의 딱지를 떼고 너와 내가 더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텐데. 독자분들도 나이 때문에 엿같았던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거다. 그 경험을 잘 돌이켜보면 이런 질문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너가 태어난 후,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나 공전했냐 때문에 왜 내가 돌아야 하지?
혹은, 그걸로 왜 우리의 위치가 결정되는 거지?
그게 왜 내 정체성의 일부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거냐고?
일화 1
"언니, 날씨가 태풍이라도 올 것 같네?"
21살의 내가 카페에서 창문을 보며 우연히 던진 말이었다.
"야, 너 왜 자꾸 반말해? 내가 항공과라 그런 거에 좀 예민하거덩?"
같이 일하던 알바생 언니가 하루 종일 내 말을 씹다가 마감하면서 툭 던지고 간 말. 아니, 하루에 아홉 시간을 같이 일하며 니가 팽이쳤던 설거지를 묵묵히 하곤 했던 내가 '요'자의 부재에 한 순간 싸가지 없는 년이 된 것이다. 그걸로 너는 나의 말을 하루 종일 씹어도 되는 거다. 재밌게도 나이란 게 그렇다. 누가 정해놓은 건지도 모를 예절이란 쫄다구를 상습적으로 달고 다니며 건달처럼 굴기도 한다.
일화 2
나이란 게 적을 때만 분통 터지는 거냐, 아니다 많을 때는 또 많다고 멕인다.
나이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비교대상에 따라 적기도, 많기도 하는데 그 말은 즉슨 시도 때도 없이 골고루 지랄 맞다는 것이다.
"아이고,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들어가 쉬셔야죠"
이건 복학생으로서 대학을 다니며 몇 번 안 간 MT 때마다 들었던 말. 술만 먹으면 잠을 자는 내 주사를 말할 새도 없이 어디선가 튀어나온 '나이'라는 짱돌에 맞아 K.O. 그런데 사실은 그렇잖아. 2년을 더 살았어도 건강한 음식 먹으며 술을 절제하며 살아온 내가, 너보다 팔팔할 텐데요?
"그래도 그 나이에 용기가 대단하네. 누나는 참,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사는 것 같아."
이건 칭찬 같지만 교묘하게 날 맥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말. '그 나이'면 참으며 해야 할 것들도, 응당 포기하며 사는 것들도 있는데, 라는 말이 전제가 되어 있는 말. 어딘가 정해진 나이 주기율표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나는 그에 벗어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정중히 사양하고 싶은 칭찬은 우리 부모님께도 무의식적으로 할까 봐 무서운 말이다. 그동안 무심코 내뱉어온 '엄마, 그래도 그 나이면' '아빠, 그 나이에는 사실 그 정도는' 이런 위로를 가장한 영양가 없는 말들을 툭 던지고 제 갈길 가는 자식이 되고 싶진 않다.
3.
열심히 침 튀기며 나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건 '나이' 하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령은 물론 성별, 이름, 혈통까지도 내가 정한 게 아니면 '나'의 범주에 저절로 포함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상 속의 나라. 아직은 오지 않은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팽이라고 불러주세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에요. "
"반가워요. 저는 수민이고 오랫동안 수채화를 그렸어요."
이게 지금 사회에서 80대 할아버지와, 20대 청춘의 대화여도 자연스러울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보자마자 경어를 쓰며 노인분에게는 어떤 주제를 꺼내야 하나, 건강하시냐고 안부부터 물어야 하나, 할머님은 어디 계신지 여쭤볼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정한 것으로만 보는 것이다.
남잔지, 여잔지, 트랜스 젠더인지 성별 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이라는 개념도 없어서 서로 초면에는 존댓말을 하는, 어느 첫 만남에서 그렇듯 처음에는 관심사를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런 날이 올까.
4.
언젠가 여성, 20대, 아시안, 부모님이 정해준 이름 석자의 타이틀을 떼고 내가 정한 것만으로 '나'이고 싶다.
불러주길 원하는 이름 : 아리
한국어 능통자. 혼자 있을 때 막춤 추는 걸 좋아함. 권진아 노래를 즐겨 들음. 목표는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꿈꾸는 사람.
2020.4.9. 오늘의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