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빠에게 애인이 생겼다.
심증이 생긴 것은 몇 달 전, 물증까지 잡은 건 어제 아빠를 미행하고 나서다.
2.
나는 푸르스름한 새벽을 꼬박 새우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깨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괴로워하다가, 눈치 빠른 나를 조금 원망하다가, 아주 많은 시간 동안 아빠 생각을 했다.
나와 엄마가 있는데 아빠는 왜 애인을 만든 거야. 어째서 다른 사람 곁에서 그렇게나 활짝 웃는 거야. 누가 보면 다른 데서는 결코 그렇게 행복할 수 없는 사람처럼.
언제나 인생을 진실되게 대하라는 건, 도대체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3.
어느새 방 안은 터질 것 같은 노른자 색으로 환해져 있었다. 창문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가 바람이 났든,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하나뿐인 딸이든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구나. 뭔가 달구어졌던 내 안의 심지가 바스라지는 기분이었다.
타오르는 용광로 안에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4.
그래서 그렇게 맥 없는 문자를 보내버린 것일지도. 삶을 달관한 현자처럼, 늙어서 꼬리를 내리고 무리를 떠나 유유히 갈대숲 사이로 사라지는 늑대처럼 힘 없이 말이다.
"나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됐어. 그래서 말인데, 행복해?"
5.
그는 지금 한강 변에서 흐르는 강물과 같은 방향으로 조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가벼운 생수통을 손에 들고 무선 이어폰으로 즐겨 듣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오랫동안 지켜온 리듬으로.
저 멀리서 날아온 문자 하나로 평온한 아침 루틴이 전과 달라질 것임은 생각도 못한 채로.
6.
문자를 보내고 나니 속이 답답했다. 녹초가 돼버린 건 내 마음과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마땅히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한 눈은 충혈됐고 경직된 몸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겨우 거실로 나가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따라 마셨다.
7.
굳게 닫혀있는 엄마 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흠칫 고양이처럼 털을 세우며 경계했다. 아침잠이 많은 엄마가 웬일일까. 조용히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데 주머니에서 익숙한 알림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몸이 또다시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빠가 답장을 보낸 것임을.
8.
설마.
역시나 아빠에게서 바로 답장이 와 있었다.
행복해서 아빠가 미안해.
7.
그가 오기까지 넉넉히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아빠 방을 뒤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혹시 엄마가 깰까 봐 2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가며 생각했다.
뭐든 찾아내고 싶다. 나 이대로 당신을 마주할 수가 없어. 그럼 정말 다 포기할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이대로 아빠 얼굴을 마주해버리면, 나는 다신 이런 용기를 낼 수 없겠지.
8.
아빠의 방에선 특유의 향이 났다.
제주도에서 사 왔다는 삼나무 디퓨저가 책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그 사람과 동행 여행에서, ' 생각이 온전한 형체를 이루기도 전에 내 손은 디퓨저를 낚아챘다. 안에 고여 있는 불쾌한 액체를 화분 위에 콸콸 쏟아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속을 토해낸 빈 병을 흙에 아무렇게나 꽂아 넣었다. 담배꽁초를 짓이기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입구를 흙에 묻었다.
9.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책이나 연습장 따위를 열어봤다. 청춘도 아니고 이런 데 사진이 꽂혀 있을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드라마에서 보면 항상 증거는 여기서 나오던 게 걸렸다. 그런 날카로운 탐색과 동시에 아빠가 흔적 하나 찾을 수 없게 제대로 숨겼길 간절히 비는 내 마음이 웃겼다가 슬펐다가, 비가 오다가 눈이 오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뭐 그랬다. 옘병, 딱 제주도 날씨네.
10.
그러던 차에 어떻게 그게 눈에 들어왔을까. 아무렇게나 구겨진 종이가 연필심이며 얼룩진 휴지 사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고 있던 책을 한쪽에 던져두고 종이를 집어 드는 순간, 1층 엄마 방에서 다시 한번 기척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 찬 방에서 구겨진 종이를 조용히 가슴에 품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11.
못 다 쓴 편지였다. 그가 좋아하는 만년필로 꾹꾹 눌러가며 쓴, 러브레터였다.
경중이에게. 로 시작하는 그 편지.
경중아,
조깅을 하다 보면 참 좋아.
폐에 신선한 공기가 가득 들어오고 몸은 가벼운 기분이 들어. 마치 내가 살아있음을 아침마다 다시 느끼는 것 같거든. 그런데 어떨 땐 몸서리치게 눈물이 날 때가 있다고 했지.
나는 흘러가는 물이 부럽다.
등을 미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나도 따라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고여있기로 한다. 바위틈에 잠자코 고여 피라미같은 것들이 거센 물살에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곳. 결국은 썩게 될 운명이겠지만 내겐 작은 피라미도, 이끼 하나도 내칠 수가 없다. 나 살자고 그 작은 것들의 등을 떠미는 물살이 될 수가 없어 난.
그런 고인물에도 한 줌의 햇빛은 필요하지 않겠니. 그래야 그 슬픈 운명이 조금은 덜 아프지 않을까.
12.
나는 미처 다 읽지 못한 그 종이를 책상에 내려놨다. 손바닥을 세워 구겨진 자국을 최대한 빳빳하게 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방으로 나와 1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문득 멈춰 서서 열린 문으로 보이는 아빠의 방을 뒤돌아봤다.
뜨거운 아침 햇살이 삼나무 향이 진하게 퍼지는 화분가를 비추고 있었다.
2020.4.13. 오늘의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