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과 나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차가운 계절에 만났습니다.
얼음장 같은 파도가 바닷속을 쳐대고 길가의 가로수는 잔낙엽을 모두 떨구고 홀로 서는 시간. 어떤 거스를 수 없는 섭리처럼 땅은 단단히 얼고 인간 역시 매서운 본성을 드러내는 바로 그 계절에 우리는 만나게 됐습니다.
당신과 나는 둘 다 따뜻한 남해안 근처에서 태어나 작은 섬들을 여행하며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바닷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햇살은 또 얼마나 따사로웠는지를 이야기하며 함께 고향을 그리워하던 순간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아있던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2.
당신을 처음 만날 때를 회상해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저는 죽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시체였습니다. 그저 아침이 오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저도 깨어났을 뿐 사실은 마음속 깊이 절망으로 죽어있었습니다. 당신의 등장 역시 그런 제게는 저녁에 해가 저무는 일만큼이나 하찮고 평범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뒤늦게 알았지만 어둠이 내려앉는 일은 결코 약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불타오를 내일을 예고하며 거룩하게 저무는 해처럼 당신도 내게 내려앉았습니다.
3.
어느 순간 그런 당신으로 인해 나의 계절이 달라졌습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두꺼운 옷이며 헐벗은 가로수들은 똑같았지만 나의 세상에는 벚꽃이 내리고 봄내음이 났습니다. 따뜻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설레고 들떴습니다. 모두 다 당신의 말과 표정과 몸짓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눈 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무리들 속에서 당신을 단번에 찾아내는 나를, 그런 내 마음을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한 겨울 아침, 눈을 떠보니 세상은 그렇게 변해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왔을 뿐인데 죽어있던 낙엽에서 새싹이 돋는 것처럼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4.
그런 저를 아예 떠나신 건 아니라 믿습니다. 잠시 고향에 가신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때 그랬듯이 갈 때도 갑작스럽게 떠나야 했던 사정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남해안은 어떠셨나요? 아직도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뜨거운 햇빛을 담고 불어오나요? 갈매기들이 까만 그림자를 수평선 위로 드리우고 있나요?
만에 하나 혹시라도, 고향보다 더 멀리 가신 것이라면 아프지 않게 아주 오랜 여행을 하셨으면 합니다.
5.
당신이 떠나간 지금도 나는 똑같은 풍경을 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거리를 꽁꽁 싸맨 채 지나가고 가로수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계절은 다시 매서운 겨울입니다. 내리던 벚꽃도 피어나던 새싹도 자취를 감추고 햇빛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대가 오기 전보다 더 혹독한 계절에 나 홀로 남겨졌습니다.
6.
저는 이제 바닥 깊이깊이 가라앉으려고 합니다. 더는 떠오를 힘도, 의지도 없는 탓입니다.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기억도 차가운 물에 가두어 두고 싶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고 아래를 향해 유영합니다. 더러운 수조의 바닥까지 닿았을 때, 죽을힘을 다해 힘차게 몸을 비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과 함께 나를 이 바닥에 묻기로 합니다.
7.
방어의 철이 지나갑니다. 주인은 싱싱한 제철 방어 종이를 떼내고 다가올 봄을 준비합니다. 수조에 물을 붓고 수세미로 닦아 윤기를 냅니다. 광을 낸 수조의 바닥에서 방어의 눈물 같은 것이 잠깐 반짝입니다.
2020.4.17. 오늘의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