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에 실패하면 확 그냥

플랜 A,B 둘 중 하나다

by 김잔잔

이번에도 안되면 나에겐 두 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다. 모 아니면 도. 이렇게 살긴 싫었지만 아주 세상이 내게 그러라고 등 떠미니 나도 별 수 없다. 하반기 취준에 실패할 경우 나는


1) 대학로에서 타로나 깔짝대는 짝퉁 사주쟁이로 버티다가 빨간 천막에서 늙어 죽는다. (몇 마디 지어내고 만 원을 꿀꺽하는 거 나름 불로소득 아니냐)


2) 북한으로 넘어가 김정은의 야식을 노량진의 명물 토스트, 컵밥, 떡튀순 같은 걸로 책임지며 그를 고지혈증과 동맥 경화의 지름길로 유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1.

눈을 뜨니 시계는 여지없이 6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다. 주섬주섬 머리맡에 놓아둔 안경을 쓰고 공용화장실로 향한다. 몸이 상쾌할 때는 딱 기본적인 것만 하고 나오는데 오늘은 어쩐지 찌뿌둥해서 안 되겠다. 이럴 땐 샤워까지 해줘야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난다.

2.

3일 만에 감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물기만 제거하고 공용 주방으로 나간다. 박박 가려운 곳을 씻어주니 새사람으로 거듭난 기분. 그러나 현실은 내 것이라고는 무소음 벽시계밖에 없는 감옥 생활 3년 차다. 주방 구석에서 요란하게 돌아가는 회색 냉장고를 열자 새사람이고 나발이고 욕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 좀도둑 새끼.


3.

고시원의 냉장고 도둑은 자가 분열이라도 하는지 한 놈이 가면 또 한 놈이 온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이번 타겟은 나다. 얼마 전부터 내 과일이 통째로도 아니고 딱 한 개씩 없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한 망에 몇 개 들었는지 모를 귤이나 씻어서 락앤락에 넣어놓는 딸기에서는 완전범죄가 가능했겠지만 놈은 바나나에서 실패했다. 대범한 새끼, 하다 하다 바나나 하나를 뜯어가냐.

고시생의 피 같은 과일을 노린 좀도둑을 어떻게 조질까 생각하며 도시락에 별 볼일 없는 반찬과 흰 밥을 담는다.

또 다른 감옥, 독서실로 출동할 시간이다.


4.

독서실 지정석에 앉아 늘 그랬듯 푸석푸석한 얼굴로 인강을 보며 생각한다. 강사님, 돈 많으시죠? 집도 혼자 살면서 60평 한강뷰에 살고 막 그러죠? 저는 대체 언제쯤이면 당신 얼굴을 그만 볼 수 있을까요? 네? 그것만 알려주셔도 살 것 같아요.


5.

어젯밤 자기 전 엄마랑 했던 통화가 생각난다.

"어때, 이번에는 좀 될 것 같아? 아니, 얘가 모르는 게 어딨어. 해보면 딱 느낌이 오잖어. 너 이번엔 진짜 얄짤 없다? 안되면 길거리에 나앉든 어쩌든 알아서 해. 엄만 몰라"

엄마도 참. 사람 힘나게 격려해주는 데 재능 있다니까.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어제의 통화를 곱씹었다.


안 그래도 삭막한 취준생의 마음에 그래,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있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넌 잘 헤쳐나갈 거다.라고 안심은 못 시킬 망정 '길거리에 나앉을 것'이라며 얄짤없이 절벽으로 밀어버리다니. 엄마! 이 정도면 살인미수야!


6.

그래, 근데 엄마 말대로 진짜 이번 하반기에도 취직을 실패하면 뭐라도 살 궁리를 해야 한다. 또다시 이 고시원으로 돌아와 인형 뽑기 기계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인형처럼 누가 나를 뽑아주길 바라며 살 수는 없다. 난 뭘 하며 먹고살아야 할까? 무슨 재주가 있지? 확 그냥 작두나 탈까? 아씨, 근데 그것도 꼼쳐둔 돈이라도 있어야 하지. 부적이고 방울이고 한복은 뭐 땅 파서 나오냐고.


7.

한 번 이어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 그냥 대학로에 텐트를 차리자. 왜 그 시뻘건 간이천막으로 대충 쳐놓고 커다랗게 "사주/연애/취업/결혼"이라 써붙인 곳 많잖아. 막상 들어가면 가격부터 안내하며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도 해줄 수 있는 조언을 애~매하게 뭉~뚱그려서 해주는 바로 그곳. 나정도 되는 말빨이면 안 될 것도 없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고민을 생각하세요'라고 웃으며 말한 뒤 '어휴, 괜찮아. 걱정 놓아도 되겠네' 혹은 '이번엔 어려울 거야. 숫자 3이랑 9를 조심해' 둘 중 하나만 골라 적당히 지어내면 그뿐인 것을.


8.

아니면 확 그냥 스파이나 될까? 국정원을 설득해 나같이 투명인간 취준생이야말로 임무를 수행하기 최적의 인물이라는 점을 어필해보는 거야. 쿠데타도 일어나기 힘든 구조다, 근데 심보는 못돼처먹었다, 그러면 뭐 답은 하나잖아. 정은이의 자연사를 최대한 앞당길 것. 나로서는 자취도 꽤 오래 했었고 노량진 밥도 이빠이 먹어 느낌 아니까 야식 전속 요리사로 임명만 해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과도한 지방으로 인해 혈관에 기름때가 꽉꽉 껴서 동맥 경화나 당뇨 합병증 이런 걸로 쥐도 새도 모르게.


9.

그니까 이번에는 제발 어디든 나를 붙여주기를. 이 거대한 음모가 영원히 망상으로 봉인될 수 있게 팔팔한 청춘을 누구든 데려가 주길. 나 인강 강사 얼굴도 그만 좀 보고 싶고요, 공용 주방에 공용 화장실도 지긋지긋하고, 사실 연애도 좀 하고 싶어요.


10.

누구든 듣고 계시죠? 거기 채용담당자님? 저 바로 여기 있어요. 축축한 고시원과 독서실에서 발효되기 직전이지만, 그래도 저 여기 살아있다구요.

(P.S 가능하면 빨리, 대학로 사주카페나 국정원이 채가기 전에 서둘러주시길)



2020.4.18. 오늘의 상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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