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에서 이렇게 솔직해도 될까

까짓 거 뭐 어때

by 김잔잔

1.

재즈풍의 음악이 흐르는 칵테일바에 어쩐지 어색한 두 남녀가 있다. 상철과 여진은 오늘 소개팅한 사이로 벽면이 거울로 된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소개팅 장소 추천'이라고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유명한 양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거리를 걷다 상철의 단골 술집으로 막 자리를 옮겨왔다.


-여진씨, 여기 꽤 괜찮죠? 제가 대학 다닐 때 자주 오던 곳이에요.

-네, 좋아요.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있네요.


2.

가게는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다. 천장의 조명만이 희미한 푸른빛을 내는 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양초가 두 사람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밝혀주고 있었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 마실래요? 먼저 고르세요.

-아, (메뉴판을 곰곰이 보며 혼잣말처럼) 이런 것도 있었나? 상철씨가 추천 좀 해주세요.

-죄송해요. 메뉴판이 좀 재밌죠? (장난스럽게) 우리 서로 골라주기 할까요?

-음.. 상철씨한테는 '누나는 해치지 않아' 이거요!

-푸하하, 그건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 일단 예거밤 베이스라니 맘에 들어요. 무슨 뜻이에요?

-별 뜻 아니에요. 제 꺼는요? 잘 골라 주셔야 해요.

-여진씨에게는 '솔직한 밤'이요.

-(흠칫) 왜요? 좀 심오하네요.

-일단 시키고 말해줄게요.


3.

두 사람 앞에 오묘한 색깔의 칵테일 두 잔이 놓여있다. 여진이 궁금한 눈으로 상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제 말해줘요.

-별건 아닌데. 그냥 왠지.. 전 오늘 밤 여진씨에게 솔직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요.


4.

유리잔을 가운데 두고 흔들리는 촛불이 데칼코마니처럼 번진다. 서로의 칵테일까지 바꿔 마시며 맛이 어떤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던 중에 상철씨가 불쑥 재밌는 제안을 해온다.


-여진씨, 우리 진실게임해볼래요?

-네?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질문 하나씩 하고 솔직하게 말 못 하면 술 마시는 게임요.

-(피식 웃으며) 지금 이거 하려고 나 솔직한 밤인가 뭔가, 시켜준 거 맞죠?

-에이 그럴 리가. 단, 룰이 하나 더 있어요. 진실게임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생각해요. 상대방이 솔직하게 대답하면 질문한 사람이 마시기로 해요.

-어우, 장난 아닌데요?

-(빙그레 웃으며) 솔직함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더 재밌으니까.


5.

여진이 입을 오므린 채 질문을 골똘히 생각한다. 미간에 작은 주름이 접힌다. 상철은 그 모습을 필름 카메라로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기다린다.


-생각났어요.

-뭔데요? 내가 하자 해놓고 긴장되네.

-나는 오늘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든다. 예스 올 노?

-와, 저 한 방 먹었네요.


상철은 그녀의 솔직하고 당당한 첫 질문에 K.O 당한 기분이다. 태연한 척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자포자기한 듯 대답한다.


-YES. 자, 여기 한 잔 마셔요.


6.

분위기는 무르익어 어느새 둘은 한 번씩 질문을 주고받았고 나란히 술도 한 잔씩 마시게 됐다. 마지막 라운드에 버금가는 1회 차를 끝내고 진실게임은 본격적인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상철의 차례다.


-여기 와 본 적 있다, 없다?

-윽, 들켜버렸네. 사실 나도 여기 단골이에요. 항상 마시던 건 '옆집 남자'고요. 근데 없어졌더라구요.

-헐 어쩐지, 굳이 왜 숨긴 거예요?

-그냥 소중한 공간에 날 초대해준 게 좋아서요. 그 순간 아는 체하기 싫었어요.

-그랬구나. 어쨌든 저는 여진씨 덕분에 이제 이 곳이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둘의 눈빛이 잠시 한 공간에 머문다.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맴돌고 묘한 아지랑이가 테이블 사이 보일 듯 말 듯 피어오른다.


7.

-제 차례죠? 아직도 생각하면 이불킥 나오는 최악의 흑역사는?

-흠, 소개팅녀에게 털어놓긴 싫지만 별 수 있나요. 짝사랑녀랑 밥 먹다가 화장실 갔는데 변기 막힌 거요. 진짜 식은땀 줄줄 흘리면서 30분 넘게 갇혀 있었다니까요.

-그 분과는 결국 새드엔딩?

-말해 뭐해요. 급한일 있어 간다는 남자가 주차해놓은 차는 밑에 그대로인데 다 알았겠죠. 흑, 어쨌든 이번 질문 각오해요.

-일단 칵테일 두 잔 더 시키구요.


8.

어느새 주변의 공기는 더워지고 테이블 위의 양초는 하얀 촛농을 쉴 새 없이 흘린다. 어느새 편해진 두 사람의 자세도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다.


-여진씨가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색다른 장소는요?

-한옥 사랑채 같은 곳요. 사극 페티시인가? 그럼 상철씨는 꿈꾸는 복장 같은 거 있어요?

-후, 앞치마요. 딱 그거 하나만.

-으, 야해라.

-이건 조금 진지한데.. 여진씨는 죽고 싶었던 적 있어요?

-음..

-말하기 힘듬 안 해도 돼요. 물론 술은 보너스!

-이제 와서 뭐 별거라구요. 엄마가 재혼할 때, 좀 그랬어요. 아빠 납골당 가서 엉엉 울면서 나도 데려가라고 막 소리쳤어요.

-몇 살이었어요?

-대학교 1학년이요. 다 컸는데 웃기죠.

-전혀요. 난 그 나이에 엄마한테 닌텐도 사달라 졸랐는데요 뭐.

-지금 나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죠?

-하나 더 말해줄까요? 미팅에서 떡실신하고 엄마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떼썼어요, 20살이.

-하하, 진짜 내가 미쳐. 마마보이는 사절할래요!


9.

그 후에도 둘은 낯 뜨거운 질문을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니 괜찮다'는 핑계를 위안삼아 밤이 깊어가도록 주고받았다. 서로가 입고 온 두꺼운 가면들을 하나씩 벗어내며 자유로워지자 생생한 마음이 드러났다. 마치 천일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사랑에 빠진 어느 왕과 시녀처럼, 하룻밤에 백 마디의 말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다. 이대로라면 내일도, 그다음 날도 묻고 싶은 질문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기분.


헤어지기 전, 여진씨가 상철씨에게 묻는다.

"우리, 소개팅에서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괜찮은 거예요?"

상철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괜찮거나 말거나 어떡해요? 오늘 밤 우리는 솔직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을 뿐인데."

여진이 그를 따라 빙그레 웃는다.

"우리 내일도 만나요, 여진씨"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수줍게 손을 잡고 칵테일 바를 나선다. 새벽하늘에 초승달이 은은하게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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