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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후 Sep 01. 2021

02. 사이드 프로젝트로 커리어 전환이 된다고요?

회계에서 기획으로, 평범한 30대 중반 여자의 커리어 전환기

2년제 대학 졸업증

학점은행제 학사증

영어 회화 유치원 수준

회계 경력 7.5년

공공기관 경력 2년

일본 워킹홀리데이 1년


30대 중반인 나의 이력서에 기재할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누군가는 회계 경력이 7년이나 있으면 꽤 괜찮은 경력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회계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나에게 중요한 경력이 아니었다.


그렇다. 나는 회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이 좋았고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회계를 7년 넘게 했다. 물론 커리어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출판 관련 공공기관에서 일하기도 했고 편집자 학교에 원서를 넣기도 했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일은 행정 업무에 가까웠고 편집자 학교는 필기에서 떨어졌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회사에 소속이 되어 일을 해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회계 경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다 보니 어느새 회계 경력이 7.5년인 서른 중반이 되어 있었다.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 또 버티다 보면 경력이 쌓여서 다른 길은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게 되겠다는 공포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버티는 인생을 살아야 하나?


이 문장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사직서를 꺼낼 용기를 주었다. 때마침(?)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한 몸은 하루 10시간 이상 앉아서 일을 하는 나에게 경보를 울렸다. 허리와 골반 통증 때문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진통제를 먹었다. 문득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이 잠시 멈출 때라는 것을. 나는 네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다.






네 번째 퇴사는 이제까지의 퇴사와 조금 달랐다. 이제까지는 번아웃되어서 에너지가 1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퇴사를 했다. 나는 방안에 웅크려서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에서 영영 매몰되어 다시는 복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등을 떠밀면 취업을 했다. 조금씩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했지만 회계라는 업의 단조로움과 사람들 때문에 번아웃이 오면 퇴사를 했다. 세 번째 퇴사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네 번째 퇴사는 달랐다.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퇴사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마음의 에너지는 오히려 충만했다. 이번에 퇴사를 하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리스트를 작성했다. 50개가 넘었다. 모처럼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버티는 인생’이 아니라 ‘살아가는 인생’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 먼저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키워드를 탐색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시도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 이런 과정이 필요했다.


나에 대한 키워드를 탐색하는 과정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 도출한 키워드는 '글, 외로움, 느슨한 연대'였다. 이를 바탕으로 퇴사 후 1년 동안 다음과 같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해왔다.


익명으로 교환일기를 주고받는 여성 글쓰기 커뮤니티 만들기

커뮤니티를 사업화해서 예비창업패키지에 도전하기

제주 한 달 살기 기획하고 실행하기

한 달 살기 하면서 자아 탐색하도록 돕는 가이드북 만들기

가이드북을 활용해서 '일하는 나'를 탐색하는 프로그램 만들기


글을 쓰고 교환하며 외로움을 해소하는 느슨한 연대를 만들고 싶어서 첫 사이드 프로젝트로 '익명으로 교환일기를 주고받는 여성 글쓰기 커뮤니티'인 '비밀 교환일기 클럽'을 기획했다. 비밀 교환일기 클럽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해서 예비창업패키지에 도전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일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깊게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한 달의 시간을 '갭먼스(Gap Month)'라고 이름 붙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갭먼스 가이드북'을 만들어서 텀블벅에 프로젝트를 오픈했다. 갭먼스 가이드북을 활용해서 '일하는 나'를 탐색하는 프로그램도 만들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기획은 다음 기획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기회로 연결되기도 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에는 어떤 그림으로 마무리가 되겠다고 예상을 하지만, 늘 예상을 뛰어넘는 다음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리어 전환도 그 '예상하지 못한 길' 중 하나였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방법을 따로 배운 건 아니었다. 그저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도해보고 회고하고 개선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득한 '빠른 시도와 개선' 스킬을 활용하게 된 셈이다. 기획의 과정 전체를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새로운 기획을 할 때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맨 땅에 헤딩하며 스스로 자라나는 야생의 기획자가 되어갔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기획을 하다 보니 ‘기획’이라는 일이 무척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실행함으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일에 기승전결이 명확한 것도 성향에 맞았다. 기획을 ‘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서른여섯,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꽤나 늦은 나이였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경험상 하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나았다. 


기획자로 도전하기 위해 먼저 커리어를 정리했다. 그동안 해왔던 일 경험을 잘게 쪼개어서 나열했다. 그리고 어필하고 싶은 기획 관련 업무를 싹싹 긁어모아서 이력서 가장 윗부분에 기재했다. 추가로 이제까지 일하는 사람으로서 해온 다양한 업무를 함께 소개했다. 이 경험이 기획에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력서에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나의 일 경험이 소개되었다.


1. 조직 내 프로젝트

프로젝트 기획: 교제 제작(외주), 크라우드펀딩 진행

콘텐츠 기획: 매거진, 단행본

행사 기획: 출간기념회, 도서 팝업스토어

2. 사이드 프로젝트

커뮤니티 기획: 여성 글쓰기 커뮤니티

콘텐츠 기획: 자아 탐색 가이드북

3. 회계, 인사, 총무

4. 공공기관 정부 사업 운영

5. 기타

일본어 번역

일본 워킹홀리데이: 도쿄국제도서전 스태프 참여


단순히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로 끝내지 않고, ‘일의 기획부터 운영, 정산까지 가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정체성을 정립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이력을 설명하지 않고,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일 경험을 내 관점에서 재정의한 것이다.

(일 경험을 나누고 나만의 맥락으로 정리하는 데에는 일하는 여성 커뮤니티 '빌라선샤인'의 커리어 기획 프로그램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력을 정리하고 보니 나는 제법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가성비 좋은 인재라면 작은 조직에서는 채용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김칫국을 마셨다. 하지만 취업의 벽은 높았다. 작은 조직에서는 경력자를 원했다. 신입을 채용해서 키울 여력이 없는 것이다. 기획자로서 처음으로 면접도 보고 과제도 제출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래도 면접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점에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탈락 소식을 전하는 면접관의 메일에 면접 기회를 주어 고맙다는 회신 했다. 그리고 다시 회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탈락에 기획자로의 커리어 전환을 포기하기에는 조금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탈락했던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새로운 일을 수주받았는데 내 생각이 났다며, 3개월 동안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급여도 이전 연봉보다 (당연하지만) 낮았고 3개월 계약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기획자로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기쁘게 기회를 잡았다. 꿈에 그리던 커리어 전환을 이룬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기획이라는 일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회계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버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커리어를 전환하려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내가 어떤 키워드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일을 시도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작은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서 시도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주었다. 나의 기획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나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버티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면, 나다운 일을 시작하고 싶다면, 삶을 바꾸고 싶다면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다음 글에서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나라는 사람의 키워드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음 편 예고: 딱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데,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건 어떻게 시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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