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서른 중반의 여자, 사는 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하다
평생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일을 시작한 지 10년 차, 이 질문이 커리어의 갈림길로 나를 인도했다. 물론 10년이 다 되도록 커리어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 건 20대 후반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문장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별 생각 없이 살다가 별 생각이 들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심 있었던 출판계에 발을 담그기도 했고, 편집자 학교에 원서를 넣기도 했고, 번역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력이 되지 않아서, 또는 시도했으나 실패해서 어영부영 다시 기존의 커리어인 회계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러다가 서른 중반, 이제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회계 7.5년, 정부사업 운영 2년, 도합해서 커리어 약 10년. 웬만하면 10년쯤 했으니 새로운 길은 포기하고 기존의 커리어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과 삶을 분리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머지 시간에 취미를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일을 하는 10년 내내 ‘나에게 맞는 일, 나다운 일’에 대한 갈증으로 괴로웠다. ‘적당히’ 거리를 두자 싶다가도 일에 몰입하다 보면 일이 삶으로 깊이 들어와 거리 두기에 실패하고는 했다. 나에게 일이란 돈벌이 수단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리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평생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 평생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가?
일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고군분투했다.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도 해봤다. 그 결과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삶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정체성이 바뀌고 성향이 변했으며, 커리어를 전환할 수 있었다. 평범한 스펙에, 서른 중반의 늦은 나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내가 주로 해온 일은 회계였다. 장부를 만들고, 세금을 신고하고, 비용과 급여를 지급하는 일을 했다. 주로 규모가 작은 곳에 다녔기 때문에 인사 업무나 총무 업무도 했다. 매월, 매 분기, 매년 거의 동일한 작업을 했다.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업무 스케줄을 미리 세울 수 있었고 일상도 예측 가능하게 흘러갔다.
이런 정적인 일이 잘 맞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반복되는 일이 계속되자 곧 지겨워졌고 매너리즘에 빠졌다. 회계는 대체로 답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여지가 없는 업무의 특성도 답답했다. 매력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나에게 매력적인 일이란, 프로젝트에 완전히 몰입해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발산하고, 모호함을 조금씩 다듬고, 아이디어를 실행해서 명확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일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조직 안팎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직 안에서 기회가 주어졌다. 출판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어필하자 출판팀 업무를 조금씩 해볼 기회를 얻었다. 처음에는 소책자의 교정 교열을 해서 넘겼고, 다음에는 더 큰 책자의 교정 교열을 맡게 되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책을 출간하는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실행까지 전 과정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출간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했고, 단행본을 만들었고, 매거진 창간호를 기획했다. 외주를 받았던 교재 제작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참여하여 콘텐츠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조율했다. 업무의 배분이 유연한 스타트업이었고 개인의 다양한 가능성을 지지해주는 조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조직 안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나에게 매력적인 일의 조건을 몇 가지 찾을 수 있었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을 좋아한다.
기승전결이 있는 일을 좋아한다.
주도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직 밖에서도 개인적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직 밖에서 했던 사이드 프로젝트는 앞으로 연재할 글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게 되겠지만,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나에게 매력적인 일, 즉 '나다운 일'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주었다. 이제 일은 버티고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도구였고, 가진 것을 나눌 기회였으며, 관심사와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실험실이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일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완전 내향인으로, 주목을 받거나 발표를 할 때면 얼굴에 피가 몰리는 사람이었다. 나서는 건 당연히 싫어했고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주저했다. 그러던 내가 커뮤니티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모임을 이끌어갔다.
기획은 다른 기회로 연결되기도 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기획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경험을 얻게 되었고, 기획자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회계에서 기획으로 커리어 전환을 하게 되었다. 사이드 프로젝트가 삶을 바꾼 것이다.
평범한 스펙으로 서른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커리어를 전환하고 삶을 바꾸어갔는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화려한 스펙이 없어서, 자신의 평범함 때문에 삶을 바꾸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와 힌트가 되어준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