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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in Park Dec 16. 2023

잊힌 나.

가족에게서 잊히고 싶은 날

가족에게서 내 존재를 지우고 싶은 날이 있다.


여권을 챙겨서 집을 나섰음에도 비행기 티켓을 끊어 훌쩍 떠나지 못하고 5성급 호텔 예약은 무슨, 10만 원 이하의 숙소 하나 결제하지 못하고 카페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가 한심한 그런 날.


2022년 다시 일터로 복귀하여 쉼 없이 달렸다. 일을 다시 시작하고 한 번에 2~3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던 날들도 다 과거가 됐다.

대통령, 여러 부처의 장관, 시도지사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행사 진행부터 해외 장관 여럿이 참여하는 국제회의 진행도 했다. 그렇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힘이 들어서 몸은 망가져가도 신이 났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점 때문에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곳에서는 "아이 엄마라서 아이가 우선시될 거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죽어도 싫고, 일중독자이기도 한지라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일정에 맞춰 일을 수행해 낼 거고, 증명할 테니까. 그리고 날 바라보며 의구심 가졌던 그들이 계속 날 찾게 될 테니까 자신 있었다. 실제로 모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했다. 2024년은 또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고 그래서 내년이 기대된다.


12월 11일 새벽 3시 30분, 2023년의 마지막 프로젝트 결과보고서를 예약 발송한 뒤,  

그다음 날 아침부터 남의 편은 내게 이제 프로젝트가 없으니 살림, 육아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랐다.

등하원, 식사 준비, 육아,...... 내가 바쁜 동안 남의 편이 많은 시간 할애하며 진행해 주었던 일이다(친정 부모님께서 도와주시는 부분이 70% 이상이긴 하지만..) 숨이 막혔다. 다시 가정주부로 그 일들을 감당해 내기가 싫었다. 당장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도망칠까?


집안일은 아무리 쓸고 닦고 해도 티도 안 나고 보람도 없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 알 수 없다. 나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예전에 한 친구가 물었다. "육아와 일 중 뭐가 더 좋으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연히 일이 천만 배 좋다!"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을까. 그들은 무슨 죄야?


이렇게 다 버릴 듯 나와서 아무 곳도 가지 못하고(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닌데도 어디 연락하고 떠나기도 귀찮다-당장 내일 일 하나 대신 수행하기로 한 것도 있고) 하루를 살아낸 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듯이 일상을 살아낼 테지만 오늘의 이 감정을 모두 담담하게 남겨둬야지 싶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브런치에 기록하고 기억해야지.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흠뻑 누리고 싶었던 그런 날을,.

사진: Unsplash의Jeff Go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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