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빅 웬즈데이(Big wenesday, 그러니까 정말 보기 드물게 높은 파도)'를 기다리는 삶을 계속했다.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오든 오지 않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게 빅 웬즈데이를 만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김연수_'여행할 권리'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근의 나에게 있어 은인 아닌 은인이다. 내 수업을 듣는 친구가 추천해 준 하루키의 단편 소설 모음집을 보며 난 사랑을 이렇게 날려 보내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뭐 책을 내거나 주제 넘게 대중 강연을 하거나 그랬던 적은 없지만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쓰다 보니 알게 모르게 하루키의 필체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등을 글에 녹여 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배경 그리고 수십여 년간 소설을 쓰면서 변화해 온 관점 등 여러 가지 것들을 알고 싶었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하루키를 유추해 보는 게 아니라 하루키 그 자신에 집중해 그를 엿보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접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책은 이런 나의 니즈를 딱 충족시켜 준 최적의 책이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도입부에 기다림을 넣었는지 궁금해 할 독자가 아주 조금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면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광경들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예를 들면 개기일식이나 개기월식 등을 언론에서 PR할 때에도 몇 십 년 만에 혹은 백 몇 년 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큰 파도 역시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장관을 보기 위한 그 찰나의 순간을 기다린다. 나는 이걸 보면서 소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다. 글이란 게 기계적 절차를 거쳐서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다. 기계적 성격이라면 언제나 정답은 정해져 있고, 반박의 여지(평론)란 존재할 수 없다.
나 역시도 글을 쓰면서 하루키와 같은 사고관을 가져 왔다. 내 글 작업의 시작은 다른 이들의 자기소개서를 도와 주는 거였다. 의뢰한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매력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글을 써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었다. 그들의 삶을 쭈욱 들으며 그들에게 소위 말해 감정 이입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숨쉬는 글이 나온다. 자신들이 한 일이 맞는데, 글을 훨씬 매력적으로 풀어 간다는 피드백을 듣는다. 그런 글이 내 초기 포트폴리오의 주류이다 보니 난 글을 쓰기 전에 무조건 많이 듣는다. 듣는 게 어려운 장르의 글을 쓴다면 많이 본다. 책을 읽는 것도 이것의 연장선상이다. 간혹 책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거의 뻔한 장르의 글을 썼을 거라고 본다. 나 역시도 퇴사일기를 쓰면서 어느 정도 콘텐츠가 쌓이니 자기 반복의 늪에 빠진 것 같다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에 독서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자기 오만이고 위선이다. 그런 이들이 글을 쓴다고 나대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시대의 아이콘인 하루키 씨도 몇 십 년 간 꾸준히 글을 썼다. 자기 같이 천재가 아니라면 매일 5시간씩 앉아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도 글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매일 규칙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면서 실력을 연마한다. 이제 글쓰기가 나의 습관이 되어서 하루라도 글을 안쓰면 어깨가 뭉치는 듯한 착각이 든다. 확실히 많은 글을 쓰면 모든 글이 다 명작이 될 수는 없다.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쓴 글에 스스로 가치 판단하는 것만큼 무례한 것은 없다. 하루키도 말했다. "언론에서 띄워주는 기사도 의미 있지만 자신의 책을 구매하기 위해 몇십 엔씩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독자들의 판단만큼 불변하는 가치는 없다." 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상업적으로 책을 판 적이 없으니까.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의 피드백만이 기준이 된다고 해 두겠다. 상을 주는 사람이든 이 글을 보는 일반인이든 상관없다. 나는 아직 아마추어라고 생각하기에 좀 더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성실히 글을 쓸 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간혹 매력적 글이 나온다. 호평이 있던 글은 꼭 카카오 채널에 올라간다. 뭐 혹자는 카카오 채널에 올라가는 것이 별 대수냐며 평가절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글이 읽힌다는 사실 그리고 좋은 글을 올리려는 카카오 MD가 선정한 글에 내 자식과 같은 글들이 뽑혔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 감히 그 의미에 제 멋대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키 씨의 에세이를 보면서 좋았던 것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꿈을 꾸는 자세였다. 그의 에너지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동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하루키 씨처럼 꿈을 꾼다. 글이란 수단으로 세상을 바꾸고 나의 여건을 바꾸는 꿈 말이다. 그 꿈이 오늘도 내가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내가 마음 속에 품었던 신념이 그래도 옳은 것이었음을 알려 준 하루키 씨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것만이 또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자가 자신들에게 맞는 정답을 찾고 그 정답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