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것이 아름다웠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처럼 /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고나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석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中
야한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거진을 연재하다 보면 결국 이 매거진 글의 끝은 남녀의 처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고 나쁘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결국에 그 둘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색깔에 따라서 그들의 러브씬의 분위기나 수위가 조금씩 달라지는 듯 합니다. 러브씬 속에서 표현되는 농밀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에 따라서 그 배역 속 배우들의 생각이 읽혀진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야한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야한 영화를 좋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모든 생각들을 저는 죄다 존중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제가 야한 영화를 볼 때, 머릿 속에 남아 있는 영화 몇 편 중 하나입니다. 아마 영화의 감동, 이야기 구조 등을 떠나 제가 정말로 질풍 노도의 시기일 때 만났던 영화다 보니 유달리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영화는 '방자전'입니다.
2010년작인 이 영화가 저에게 기억에 남았던 건 그 당시 제가 군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에 드넓은 스크린 속에서 보여졌던 장면들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어떤 충격보다도 저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이후, 조여정이 보여 줬던 행보들은 연기파 배우의 행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도전은 응원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가 연예계에서 갖고 있던 포지션상 파격적 변신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했습니다. 전도연이 해피 엔드를 찍을 때보다도 그녀의 위치는 더 애매했죠. 뽀뽀뽀 뽀미 언니가 그 전까지 그녀 하면 기억되는 대표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몇 번을 봤습니다. 단순히 러브씬에만 주목해서 진주 같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우선 조연인 류현경 님의 애잔한 표정이 머릿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인 방자(김주혁 분)를 차지하고 싶지만, 그의 마음이 워낙 춘향에게 쏠려 있어서 어떻게 공격적으로 돌리기 위한 시도조차 못하는 슬픈 캐릭터였습니다. 꿩 대신 닭 같다고나 할까요? 몽룡(류승범 분)과의 러브씬을 하면서 그를 방자의 대체자로 인식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데 왠지 모르게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습니다. 일기예보 노래 중에 '인형의 꿈'이라고 짝사랑의 대표 노래가 있는데 거기서 다뤄지는 짝사랑처럼 맑고 영롱한 게 아니라, 세월의 풍파에 찌들어서 닳은 대로 닳아 버린 사랑을 보여주는 그녀가 안쓰러웠습니다. 더 슬펐던 것은 러브씬이 끝나고 나서 누워서 말하는 그녀의 진심이었습니다. 원래 방자를 좋아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몽룡의 표정이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킬링 포인트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두 번째는 (분명히 감독이 의도한 것이었을 텐데) 남자 배우들의 실제 이미지와 맡은 배역이 상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지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김주혁 님께서 돌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방자를 맡았고, 껄렁함의 대명사인 류승범 님께서 지식인의 롤인 몽룡을 맡았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방자가 선(善), 몽룡이 악(惡)의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춘향전의 변주, 방자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두 배우들의 절묘한 체인지 및 호연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올해 영화상에도 김주혁 님이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더라구요. 다시 한번 김주혁 님의 명복을 빕니다.)
결말에 대해서는 스포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방자가 춘향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랑이 외부 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정말 굳세다는 게 직접 겪지 않아도 확 와 닿았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모두에게 가슴을 파고 드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한 번 꽂힌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품은 연정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방자의 우직함은 요새 청춘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SNS의 대중화로 카카오톡으로 이별을 얘기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주는 묵직함에 비해 우리가 사랑을 대하는 자세는 참으로 가볍습니다. 그만큼 쉽게 변심하고 쉽게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 역시도 연애를 하고 있다 보니 사랑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이 <음란서생>, <방자전>, <인간중독> 이렇게 3부작을 연이어 냈습니다. 아직 음란서생을 제대로 보지는 않아서 이 감독이 이 3부작을 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유추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본다면 세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대가 다 다릅니다. 아마도 내가 사는 시대가 언제든 그 때의 사랑은 어김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들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