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에서 헤어나오려면, 시간이 들겠지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
여전히 버리지 못한 버릇 중 하나가 있는데, 나는 나의 감정 표현을 꼭 고스란히 해야 직성에 풀린다는 점이다. 이것이 솔직함과 순수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어떤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그런 모습들이 누군가를 해하거나 괴롭게 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내가 그 감정의 굴레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의 무게조차 변변히 이겨내지 못해 바깥으로 그 감정의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목소리를 낸 순간은 잠시간 후련함을 느낀다. 애석하게도 그 후련함이 지속되지는 못한다. 금세 후회를 한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단 몇 초나마 후련해지고 싶어 난 또 마음의 소리를 내질러 버린다. 후련함과 후회가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내성이 생겨 버렸다. 후회는 점점 희미해진다.
그런 나에게 탈이 난 건 얼마 전이다. 그 감정이 호감이든 슬픈 감정이든 난 또 내뱉고 말았다. 그 전까지는 이 감정에 대해 상대방에서 호응을 잘 해 줬다. 그래서 난 그것이 당연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결과론적으로 내 패착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난 당황했고, 방황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방황은 끝나지 못했다. 여러 권의 책도 읽고, 혼자서 생각에도 많이 잠겨 보며 방황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애썼다. 완벽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결론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일시적 괴로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 괴로움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켜 버렸다.
몇 년 전, TV 프로그램 중 '나는 남자다'에 김제동이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나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순간, 이제 고민의 몫은 상대에게 넘어갔다." 그 때에는 그 말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지만, 인생을 조금 살다 보니 그것이 무조건 정답은 아님을 알았다. 말의 무게가 참으로 무겁다. 마음에 묵혀 둔 것들을 입밖에 내뱉는 순간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카페 사장님이 글을 쓰고 나서도 퇴고에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나 보다. 그 분이 곧 독립서적으로 책을 내는데 파리에 유학 갔을 때, 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로 남겨 놨고 그 시들을 매만지는 데에만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도 글로 나의 브랜딩을 하는 사람이지만 음미하고 신중하게 글을 세상에 내놓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속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와중에 그 때 그 때 문장을 점검하고 읽어보는 것이 나의 글 쓰는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그래야 한 편이라도 콘텐츠로 내놓고 그렇게 양적으로 승부하다 보면 어느 누군가에게 예상치도 못했던 내용이 울림을 주니까 말이다.
어제 나와 인터뷰를 하고, 그 인터뷰 내용을 반영해 독립출판을 하시는 분께서 내 글 중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고 하셨다. "회사에선 무능하지만, 인생에선 유능하라" 부끄럽게도 나는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자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로 와 닿을 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 순간 생각나는 내용을 직관적으로 글에다가 담아냈던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 단점만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 작법 그리고 그 작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관이 완벽한 정답이라고도 볼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며 더욱 다양한 유형(특히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것이 명료해졌다.
내가 나에게 좀 더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쓰는 글에 신중을 기한다는 것. 그것이 과거의 실수까지 바로잡아줄 수는 없겠지만 이후 살아갈 나의 삶에 분명 좋은 약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