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음미하고 공부하는 저의 사모임, 리드링크
세상은 비어 있다.
허공을 채우려고 하는 일은 부질없는것.
그럼에도
나는 채우고..
또 채우려고 몸부림을 친다.
채우고 나면 다시 비어 있고
또 채우려고 하면 또다시 비어 있는
몸과 마음과 세상을 채우려 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무엇인가
한승원 <바닷가 학교> 中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참가하는 사모임을 소개해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Re;drink
읽고 마시고, 그걸 곱씹어 본다는 뜻으로 만든 모임입니다(이거 맞나?).
현재까지 3번 정도 모임을 했는데, 한번은 참석했지만, 주제가 저와 안 맞아 집중해서 듣지 못했구요. 두 번째 모임은 불참했습니다. 세 번째 모임까지 불참하면 안 될 듯해 갔습니다. 주제도 제가 좋아하는 술이었기 때문이죠. 바로 위스키였습니다.
사실 술을 좋아하는 저였지만, 딱히 좋아하는 주종이 있을 정도로 몰입하지는 않습니다. 커피 같은 느낌인데, 어떤 커피가 싸고 비싼지 아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저에게 있어 좋은 술의 기준은, 들어갔을 때, 맛있는 것, 다음 날, 숙취가 적은 것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위스키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의 이야기와 함께 테이스팅하는 위스키 모임이란 게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게다가! 위스키와 함께 다루는 분이 무라카미 하루키였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란 책을 따로 쓸 정도로 위스키에 조예가 깊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니 저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조차 읽지 않은, 독서 짱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하루키의 글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루키 님의 글은 읽으면 계속 빨려들게 만들더라구요. (물론 다 읽지는 못하고, 아일랜드 부분만 읽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완독하고, 완독일기에서 소개하겠습니다).
특히 위에 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참 좋아합니다. 꾸준함의 대명사, 하루키 님처럼 저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루 6시간 이상씩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끄적거려보겠노라고 다짐하게 만든 책이기도 하거든요.
어제 소개된 위스키는 크게 세 종류, 아일랜드, 미국, 일본이었습니다.
어제의 모임지기님께서 아일랜드 위스키, 그 중에서도 아드벡을 직접 가져오셨습니다. (아일랜드가 위스키의 대표 국가라고 하더라구요.) 아드벡을 마셨을 때, 쏴아- 하면서 퍼지는 느낌이, 처음 제대로 된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습니다.
이 싸함을 만들어내는 게 피트란 존재 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이탄이라고 하던데, 그 특유의 바다 맛이 느껴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입부에 제가 썼지만,
모든 사람들은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하지만, 채우고 난 뒤의 만족감은 정말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금세 사라져 버리죠.
그래서인지 뭔가를 먹고 마실 때, 여운이 조금이라도 길게 남는 걸 찾는 것 같습니다.
맛있는 것들은 음미하게 되고, 음미하다 보면 여운이 짙게 드리우고,
그 여운을 맛보면서 잠시간이라도 잔잔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제 먹은 위스키는,
위와 같은 이유로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어제, 행복했습니다.
몇 모금 먹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그 외 미국, 일본 위스키에 대한 설명도 듣고,
일본 위스키를 만드는 회사인 히비키가 아일랜드 대표 브랜드인 발베니와 애런을 샀다는 것.
발베니의 증류소가 11달은 일반 발베니를 만드는 데 쓰이고, 1달은 피트가 가미된 발베니를 만든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위스키에 대한 정말 기초를 배웠고, 이제 저만의 위스키를 찾는 여정을 밟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요새 술 멀리하고 살았는데...)
이 모임의 후반전은
위스키를 두고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쓰고 잡설이라 읽습니다).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고,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바뀌지 않는 사회, 몇 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함께 고민했습니다. 기득권을 쥐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행보가 옳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추종하면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이들에 대한 날선 비판도 나왔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어떤 사안에 대해서 누구든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대신,
그 차이를 점진적으로 메워 가면서 화합을 도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도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어떤 정답도 없습니다.
대신 모두의 이야기가 곧 정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꿈꿉니다.
누군가는 모두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어느 포인트에서 시작될 지 알 수 없고, 역사적으로도 의외의 지점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왔던 걸 우리는 많이 봐 왔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더욱 필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어야 우리는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