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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vs. 자존감

이제는 너무 많이 아는 나를 위한 변명

by 하리하리

오늘 글의 주제는 자존심과 자존감이다. 참, 한 글자 차이로 두 단어가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자존심 앞에 붙는 형용사가 이런 의미 차이를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그 사람들이 자존심을 붙들어 매고자 발버둥치는 건지, 누가 봐도 자존감이 굳건한 사람인 건지 느껴진다. 나는 사람들(물론, 취업 준비생이란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과 인터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과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경험을 한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 나는 양보라고 본다. 내가 가진 걸 기꺼이 남에게 내어줄 수 있는 여유라고 명명해 보겠다. 사실 굳이 손에 쥐는 걸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정도도 양보에 속한다. 그런데 요새 세상이 각박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여유가 없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참 귀한 요즘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나의 마음 속 한 칸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게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여유로운 마음으로 타인을 위해 양보하지 못할까? 극렬한 경쟁 체제 속에서 자신이 언제나 밀린다고 생각하는 압박감 때문이라고 본다. 분명히 누가 봐도 상당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만족하지 못한다(물론, 그 행복이란 단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고등학교 때부터 따르던 수학선생님이 이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아둥바둥하지 말라고 한다. 그냥 이 젊음의 순간을 오롯이 즐겨도 모자랄 이 시간에 그런 시선에 주눅들지 말라고 격려해 주셨다. 정말 힘이 되었다. 허우대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낮다면서 나를 다독여주시던 점봐 주시는 누님도 그 때 티는 안 냈지만, 눈물 날 정도로 감사했다.


앞으로 자존감 센 척 안 하려고 한다. 이걸 인정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자존감이 강해질 수 있을지 고민할 거다. 무조건 사람 눈 보고 대화할 거다. 돌이켜 보면, 나는 사람 눈을 보고 대화를 잘 못했다. 왜 그랬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내가 주눅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려니까 진짜로 눈물이 핑 돈다. 내가 안쓰럽다. 이제 하나하나씩 나의 자존감을 이유없이 갉아먹었던 과거의 나와 결별할 거다. 사실 눈 보고 대화하는 게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내가 뭘 해야 나의 자존감이 온전히 회복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눈앞의 것을 열심히 하면서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닥치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직 내 눈 앞에 도래하지도 않은 걱정으로 전전긍긍하지 않겠다.


하나 더, 취미이자 취향을 가져보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예전부터 글쓰는 걸 좋아했으니 지금 이렇게 자기소개서와 관련 없는 장르의 글을 쓰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껍질을 깨는 변화이다. 아는 동생이 추천해 줬는데, 연극 모임도 한 번 알아보려고 한다. 내가 잘 하는 거랑 이어지는 활동들을 찾아보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보이겠지.


ps. 글을 일정 정도 분량을 써야지 발행을 허락하는 스스로의 굴레도 벗어나 보겠다. 그냥 이 정도면 됐다 싶다면, 발행 버튼도 용감하게 눌러보겠다. 이런 식으로 작은 것부터 해결하다 보면, 나의 자존감이 어느덧 올라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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