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평가

벽은 억압이 아니라 울타리였다

by Blue paper

바람을 막아주던 벽,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25년 1월.
35년간 몸담았던 직장 조직은 나에게 굳건한 울타리였다. 대기업이라는 사회적 위치와 매일 슈트 차림의 나이스한 복장은 실제 능력 이상으로 타인의 선망을 받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의 삶은 정해진 알람시계처럼 반복되었고, 예측 가능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이제 나는 그 틀을 벗어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서 있지만, 돌아보면 그 ‘제한’은 억압이라기보다 오히려 ‘보호’였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이라는 담장은 나를 가두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바람을 막아주던 따뜻한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골로 떠나던 날, 뱃고동이 들려왔다

35년의 경력을 내려놓고, 1톤 트럭에 약간의 짐을 싣고 대부도 시골집으로 향하던 3월. 이곳은 아직 한겨울의 찬 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파트 숲과 빌딩의 풍경 대신, 저 멀리 서해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대형 화물선이 보였다. 그리고 들려온 뱃고동 소리.

그 순간 문득,
‘여기라면, 나의 시간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겠다’
는 기대감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로 하루를 설계할 수 있다는 자유.
그 자유는 생각보다 훨씬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낯설지만 천천히 스며드는 풍경

처음 몇 주는 새소리와 바닷바람에 눈을 뜨는 일조차도 어색했다. 하지만 작은 가방에 맥주 한 캔과 소시지를 넣고, 텅 빈 갯벌과 방파제를 천천히 걸으면 조급한 마음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약 한 달간 비어 있던 집 앞마당에서는 옆집 할머니가 수레를 밀며 지나갔고, 나는 나가서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의 덕담은 오랜 시골살이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지난 5월, 고구마 모종을 심던 날.
위쪽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면 하루 종일 걸려요” 하며, 직접 모종 심는 요령을 시범으로 보여주고 가셨다.
이런 작고 소박한 교감 하나하나가,
‘정말로 내가 이곳에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을 안겨주었다.

사람들, 정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다

곧 친구들과 전직 동료들이 하나둘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의도 본점에서 퇴근하던 후배는 “이거 드리면 동네에서 인기 짱일 거예요” 하며 사은품을 바리바리 챙겨 왔다.
그 정성은 내게 큰 감동으로 남았다.

이삿짐을 도와준 친구와 후배는 시골살이 노하우를 세세히 전해줬고, 덕분에 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쓸모 있는 정보’가 되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부터 일회용기, 마당 관리까지.

지역에 뿌리내리는 중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차츰 넓어졌다.
정회원으로 가입한 탁구장은 아직 참석률이 저조하지만, 어색하던 이장 아저씨, 옆집 할머니, 옆옆집 아저씨와도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체육센터에서는 수영과 헬스를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었고, 수영은 중급을 넘어 상급 진입을 준비 중이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라 그런지 늘 반갑게 맞아주시고, 그 따뜻함이 좋다.
이제는 프리다이빙에도 도전해보려 한다.

삶의 화음을 배워가는 중창단

특히 ‘하사랑 남성중창단’ 활동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성당 주보에 실린 단원 모집 공고를 보고 방문해 가입했고, 이후 몇 차례 특송 무대도 함께 했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 접하는 화음.
하나의 음이 또 다른 음과 만나며 만들어내는 풍성한 울림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매주 이어지는 성당 모임과 연습은 나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남은 과제들, 그리고 나의 다짐

그러나 반년을 돌아보면 미완성으로 남은 일도 많다.
피아노는 몇 번 건반만 두드렸을 뿐이고, 하모니카는 지갑 속 케이스에 그대로다. 기타도 조율조차 못한 채 한켠에 놓여 있다.

부동산 경매 참여는 계획만 세웠을 뿐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고, 탁구 모임도 자꾸만 핑계로 미뤄졌다.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의 여정에 55점을 준다.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다음 반년은 ‘실천의 시간’으로

앞으로의 반년은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단단하게 나아가고 싶다.
다시 어린 시절의 동그라미 시간표를 꺼내보자.
경매 현장 실전 참여 한 건 이상,
탁구를 통한 지역 네트워크 참여,
새로운 취미 하나 마스터하기.

그리고 이 새소리 들리는 아침이
또 하나의 인생 설계도가 되기를.

책에서 본 말이 떠오른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다.”

아직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이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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