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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마녀 Sep 17. 2023

난 역시 개년이다

엄마한테 만큼은

며칠이 지났다.  강여사에게 더 묻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더 묻기로 결심했다.


실은 아빠 얘기를 길게 들어봤자 결국 기분만 상할 것 같아

말 꺼내놓고 서둘러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엄마의 얘기를 듣다가도 아빠에 대한 욕이 길어지면 듣기가 싫어진다.  

웃는 얼굴로 말을 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그전에는 대개 아빠가 뭐가 그리 나쁘기만 했냐고 싸우다 서로 토라져 끝나곤 했다.


그래서 난 개년이다. 엄마한테는.


엄마, 며칠 전에 아빠가 젊었을 때 약탕기 걷어찼다고 했잖아.  
아빠가 살면서 또 그런 적 있어?


있지.


있어? 있었구나(없었길 바랐지만...)

얼마나? 몇 번 정도?


아빠는 살면서 몇 번의 못된 성질을 더 부리셨다.

엄마가 기억하는 건 총 5번 정도다.


한 번은 제사상을

두 번은 밥상을

다른 한 번은 옆집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엄마의 생일 케이크상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에 갓난아기 때, 학교 가고 없었을 때라

기억에도 꿈엔들 알 수 없었던 순간들이다.


강여사는 한 사건 한 사건을 어제일처럼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는 젊어서 밖에서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집안 살림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엄마가 해놓은 음식을 제사상에 서둘러 차리라 했다고,

키우던 개 밥 안 주고 지들만 밥 먹고 있다고

생일은 무슨 생일이냐며 상을 걷어찼다.

이유는 늘 어이없는 것들이었다.


때거리가 없어 외상으로 라면 한 봉지 사다

당신은 라면 국물만 먹으면서도

배고파하는 어린 자식들 나눠 먹이며

미안함이 솟구쳐 오를 때

아빠는 키우던 개새끼 밥 안 챙겨줬다고 밥상을 걷어찼다.


개차반 짓거리나 다름없는 날벼락 아빠의 행동에

강여사는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을 거다.

그 분노가 그 미움이 그 설움이...


기억을 끄집어낼 때 마음을 치고 올라오는 하염없는 눈물은

긴 세월도 막지 못하는 모양이다.

엄마의 눈과 뺨은 말하는 사이 눈물로 얼룩졌다.


옆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던 언니는 핀잔을 주었다.  

왜 엄마 울게 그런 얘기는 자꾸 묻냐고.


그런 얘기가 뭐가 어때서.  엄마가 자꾸자꾸 그런 얘기를 해서 속풀이를 해야지.

우리한테 위로도 받고 엄마 마음도 편해져야지.  

언젠가 아빠 얘기도 웃으며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않겠냐고 말했다.


언니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깊이 파인 상처를 흔적 없이 낫게 할 수는 없겠지만

꽁꽁 싸매어뒀던 감정을 꺼내 자주, 많이 마주하고 느끼다 보면

조금이라도 치유가 되어 새살이 돋지 않을까

아빠 얘기를 좀 편하게 하는 날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

나는 계속 묻기로 했다.


아빠가 상을 엎을 때마다 엄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고로 밥상 엎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인간 없다고 했다.

밥상을 엎는 사람은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이니, 그런 인간과는 못 산다며 짐을 쌌다.

그럴 때마다 집주인 아줌마가, 옆집 아줌마가 애들 생각해서 참으라며 엄마를 주저앉혔다.


실제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외삼촌 댁으로 가출을 감행한 적도 있다.

중고점에서 사입은 600원짜리 남방과 500원짜리 몸빼바지를 입고

당시 어렵게 구입했던 60원짜리 중고 곤로를 30원에 되팔아 차비를 마련해

친정 오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듣는 내내 그때의 엄마 모습이 처연하게 사무쳤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얼굴 맞대고 아이들한테 아빠 얼굴 보여주고 헤어지라는

외삼촌 부부의 설득으로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엄마가 아빠와 헤어졌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나로 컸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고비가 엄마에게 그리고

나도 몰랐던 사이 내게도 있었다.


그 이후로 아빠는 엄마에게 잘하겠다고 싹싹 빌으셨다.

엄마는 다시 주저앉았다.  

어린 자식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보고 있었을 테니.

결론은

잘해주긴 뭘 잘해주나, 밥상 엎는 일은 없었어도 엄마의 고된 삶은 이어졌다.  


생활비를 제때 주지 않는다거나 쌀값만 준다거나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아빠는

엄마에게 녹록지 않은 삶을 선사했다.  

번 돈은 집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향하고 흔적도 볼 수 없었던 것이 부지기 수였다.


사이좋은 노부부를 볼 때마다 왜 우리 엄마아빠는 저런 부부가 못되셨을까

아쉽다 생각한다.

부모로서의 인생보다 여자 남자로서도 좀 더 다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 느껴진다.


나도 아빠의 단점을 알고 있다.  누구에게는 최악일 수 있는.  

친구 좋아하고 귀가 얇은 탓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그것도 아주 잘 가는 타입.

그 탓에 속기도 잘 속고 뒤통수도 잘 맞는 타입이셨다.


아빠가 친구가 사는 인천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그 사랑해 마지않는 동화 같은 고향 마을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슬펐는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곤 인천에서 1년도 채 못되어 다시 친구 따라 지금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강행하셨다.

그 탓에 나는 국민학교 1학년을 3곳의 학교에서 보내야 했다.


이사를 다닐수록 우리 집 가세는 날로 기울었다.  

엄마는 여기저기 이웃집 아줌마가 부르는 곳이면 달려가 남일도하고 공장에도 다니셨다.

돈을 직접 벌게 된 엄마는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사 먹이고 예쁜 옷도 사줄 수 있다는 것에

삶의 기쁨을 찾아가셨다.  이른바 치사하게 손 안 벌리고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존감의 회복이었을까.

지금도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그 시절을 들려주는 강여사를 볼 때면 심장이 찌릿하다.


엄마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결혼을 안 했다면,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자식이 없었다면,

정말 똑똑한 우리 강여사는 뭐가 되어도 되었을 텐데.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엄마다운, 아니 엄마 이전의 한 사람

강여사로서 강여사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엄마의 엄마가 아니었던 때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태어나보니 엄마가 엄마였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엄마였어서

우리 엄마로서의 엄마밖엔 모른다.


강여사의 청춘은 어땠을까


학창 시절을 만끽했던 10대 때 나는 10대의 엄마를, 친구들이 마냥 좋았던 20대 때 나는 20대의 엄마를,

여행이 좋다면서 퇴직금을 몽땅 해외여행에 쏟아부었던 30대 때 나는 30대의 엄마를 그릴 수가 없다.


엄마의 10대는 어땠을까.  20대에는 뭐에 설레었을까.  

30대엔 어떤 꿈을 품었을까.

엄마에게 남들 다 있는 눈부신 청춘이 있었을까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엄마였으니,

청춘이란 이름을 가진 한 청년이고 여자였을 거란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질 못했다.  

엄마는 나의 엄마, 나는 그냥 나.

이렇게 삶의 고리가 이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그렇게 생각하니, 난 또다시 개년이다


남들에게 갖는 관심의 눈곱만큼이라도 더 빨리 엄마에게 관심을 더 쏟았으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고 위로를 삼아보려 하지만, 한 해 한 해 체력이 달라지는

강여사를 볼 때면 후회란 놈에게 마음의 한편을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나는 마냥 행복하기만 한데

엄마는 내 엄마여서 어떨까 묻기가 겁난다.


말하자면, 나는 엄마의 설움과 고달픔 위에서 엄마의 청춘과 기운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셈 아닌가.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지금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지만

한참 아빠 병간호를 하며 지쳐있을 때

우리와 조금이라도 마찰이 생기면 그런 소리를 하곤 하셨다.

정말 끔찍하게도 듣기 싫은 말이었다.


엄마는 열에 한 번만 잘못해도 그런 소릴 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 자식 힘 빠지게.
이제부터 엄마 위해서 뭐 하나 봐. 안 해 진짜 안 해


하지 마, 하지 마. 언제 뭘 그렇게 잘했다고.


날 선 말들로 가슴을 후벼 파면서도 눈하나 깜짝 안 하고 내뱉었던

그 말들을 모두 주워 담고 싶은 요즘이다.


여인으로서 삶은 서럽고

아내로서의 삶은 고되었으니

엄마로서의 삶만큼은 이제라도

의미 있게 해드리고 싶은 요즘이다.


마음만큼은 굴뚝인데.  


종종 내 마음에 뿔이 나고 비딱선을 탄다 해도

나는 지체 없이 제 자리로 돌아와 엄마를 향한 선로에서 탈선하지 않고

끝없이 사랑을 향해 달릴 것이다.


더 이상 개년은 되지 말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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