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ㅣ 허블
올초 북스타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즈음
여러 책 계정의 피드에서 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제목이 너무 신선하고 표지도 예뻐서 에세이인가
하고 책 소개 내용을 봤는데
앗?! SF소설?!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은 멀리해 온 터인데
하물며 국내 SF소설이라니...
내 독서 취향과 거리가 먼 책일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북스타그램 친구들의 극찬 위에 극찬이 쌓여
시선이 머물렀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라는 북스타그램 친구들과
읽게 되면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러다 기억에서 멀어질 때 즈음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낯익은 커버의
책과 조우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
한 장 한 장 넘겼는데 놀라움의 연속
책 커버를 넘기는 순간 들어온
93년생 김초엽 작가
출생 연도에 놀라고, SF적 작가 이름에 놀라고
그렇게 책의 첫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순식간에 눈과 손끝을 빨아들였다.
놀라움의 여파는 이후 이어진 저녁 모임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93년생 국내 SF소설에 대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지인과 최인아 책방에서
만났는데, 책을 선물하겠다고 하여
고민 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바로 빨려 들어가지는 못했다.
손을 대면 뗄 수 없을 것 같아
제대로 빠질 수 있는 때를 찾았다.
지금,
반전의 제목이 이끄는 이 책에 매료될 시간
다시 마주한 순례자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그런 세상을 우리는 지구에서 꿈꾼다.
다른 지구가 아닌, 지지고 볶아도
이 지구에서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씁쓸하고 쓰리다.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더.
제법 그럴법한 이야기 아닌가.
멀지 않은 미래에 아니 이미 와 있는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관내 분실'
아빠가 그러니까 나의 그리운 아빠가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나신 지 몇 해째인가
아직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기만 하다.
눈물이 멈출 때쯤 힘겹게 버티고 있던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늙어버린 작은 여자
엄마에 대한 집착은 그때부터였다.
건강을 핑계로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엄마는 늘 귀찮아한다.
그래도 엄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너무 작은 여자, 너무 사랑스러운 여자
나의 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엄마와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다.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이어가고 싶다.
엄마는 우리를 세상과 연결해 준 우주니까.
하나의 우주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겹고 그립다.
또 하나의 우주는 오래오래 품고 싶다.
엄마가 우리와 연결되었음을
알게 해 드리고 싶다.
그래서 엄마가 몹시도 궁금하다.
엄마의 청춘은 어땠을지
엄마의 10대는 어땠을까.
20대에는 뭐에 설레었을까.
30대엔 어떤 꿈을 품었을까.
엄마에게도 눈부신 청춘이 있었을 텐데.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 <관내분실> 중에서
'관내분실'은 세상과 단절되었던 엄마
가족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했던 엄마
죽은 후에도 잊힌 엄마의 이야기다.
도서관에 삶의 기억과 기록이 존재하는데 찾을 수 없는 엄마
영원히 이 세상에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엄마
그 엄마를 찾는 여정에서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된 딸의 이야기이다.
아, 맞다. SF 지.
읽는 내내 잊고 말았다.
그리고 몹시도 흔들렸다. 유독.
아빠가 잘 계시나,
엄마는 지금 괜찮나
컴퓨터 위로 고개를 빼꼼 들어 엄마를 본다.
후루룩 맛있는 국수를 면치기 하며 한 번에 빨아들이듯
소설 한 편 한편을 빨아들였다.
아니, 정확히는 빨려 들어갔다.
올해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후로 흡인력이 좋은
두 번째 책을 만나 여간 흥미진진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7편의
소설로 구성된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이다.
그중 한 작품의 제목이 소설집 전체의 제목으로
자리 잡았다.
<책의 차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007
스펙트럼 .057
공생 가설 .09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45
감정의 물성 .189
관내분실 .219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273
한 편 한 편 다 다르지만 각 소설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 사랑, 이해.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편 전 우주적인 미래 과학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모순과 불합리, 아픔과 슬픔, 초인류적인 사랑과
이해가 있는 에세이 같다.
너무 멀리 있지 않은, 어쩌면 이미 와 있는데 놓치고 있는지 모를
그럴법한 시대의 삶
AI와 로봇 같은 최첨단 과학이 선사하는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시대적 삶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이란 그렇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고 있는 쟁점들을 생생하게 끌어내면서도
인간다운, 인간만이 느끼고 가질 수 있는 감정과
온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젊은 작가의 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굉장히 지적인 상상력과 현실감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이 책이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는 비결이 아닌가 싶기도 한 지점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거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우리가 이 지구에서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켜낼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는
우주가 있은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즘같이 보이지 않는 총성,
보이는 총성까지 난무하는 시대에
더 그 의미가 뼈아프게 느껴지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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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빛의 속도로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