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도 기분은 나빠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평소 애교 많고 잘 웃는 강여사가 한 번씩 화를 낼 때면 그러실만하다 싶어 이리저리 요리조리 풀어드리려 애를 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딸도 기분 나쁜 건 나쁜 거다. 갑자기 날벼락도 유분수지. 씩씩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요즘 강여사가 버럭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날이 잦다. 갱년기는 지났어도 한참 지났을 연세이시건만, 제대로 갱년기를 못 보내 늦갱년기가 온 건가 싶기도 하고. 강여사는 내 잔소리가 늘 심하다 핀잔을 주신다.
한 마디도 안 지고 따박따박 지적하는 것도 싫단다. 그냥 강여사를 내벼려 두라는 말씀만 자주 하는 요즘,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건지 이해하기 힘든 날이 잦아지니 내 기분도 상하기 일쑤다.
강여사를 걱정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로 들린다니. 마치 십대 자녀와 싸우는 듯한 형국이다. 섭섭해도 별수없이 강여사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내가 말을 아끼는 수밖에.
강여사는 손녀 유치원 연극제에 다녀오신 후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나는 강여사가 시킨 심부름 상황과 택배 상자를 정리한 얘기를 하다 냉장고가 꽉 찼다고 말했다.
때가 때인지라, 명절 전 준비와 선물 등으로 냉장고에 더 넣을 틈이 없었다. 강여사는 냉장고가 너무 꽉 차면 냉동이 잘 안 될 거라며 걱정을 하다가 갑자기 얼마 전 주문한 만두와 냉동식품들 타박을 하셨다.
"냉장고에 넣을 데도 없는데 그 만두를 잔뜩 시켜가지고, 왜 그런 걸 시켜서는 원."
"아니 엄마, 그거 주문할까? 했더니 시키라며. 엄마가 시키라고 해서 시킨 거잖아요."
"하하하"
"엄마, 냉동고에 보니 문쪽 칸칸에 얼음팩 많이 모아 두셨던데, 그거 왜 모아 두신 거야?"
"어, 그거 여름에 김치냉장고 성능이 떨어져서 넣어두려고 모아 뒀지."
"아, 그럼 지금 그 팩들 다 정리하고 5-6월 즈음에 생기는 얼음팩 뒀다 쓰면 되지 않을까? 지금 저것들 치우면 거기에 만두 봉지들 몇 봉은 더 넣을 공간이 생길 것 같은데."
"요즘 얼음팩들은 다 물 얼려서 온 거잖아. 그건 쉽게 녹아서 못써. 그래서 예전 꺼 모아둔 거야."
"아냐, 요즘 얼음팩들 어떤 건 물이고, 어떤 건 그냥 예전 같은 얼음팩이야. 우리 집이 택배 안 시키는 집도 아니고 5-6월쯤에 다시 챙겨 놓으면 되잖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정말이지. 그러다 서로 같은 말을 두어 번 반복하게 됐다.
"참나, 어휴 듣기 싫어 절로 가 절로. 니가 다 갖다 버리고, 5-6월부터 니가 살림해. 우리가 또 얼마나 택배 시킨다고. 만두 같은 거는 왜 사서는."
"엄마 우리 택배 자주 시키잖아." 난 계속 애써 웃으려 했다. "내가 그럼 정리한다 내일. 그리고 만두는 다 엄마 드시라고 시킨 거잖아."
"아고야, 뭘 그걸 날 먹으라고 시킨 거라 하냐."
"아니 엄마, 왜 그래"
"됐어 됐어. 으휴 듣기 싫어 싫다고. 알았으니까 네가 다 갖다 버려, 버리라고."
정말이지 진짜 이를 악다물듯한 강여사의 어조에 당황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강여사는 세수를 하고 치아를 닦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시나 싶더니
갑자기 주방 냉장고에서 우당탕탕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냉동고에서 얼음팩들을 꺼내 봉투에 내팽개치듯 담는 소리였다. 강여사는 얼음팩을 다 꺼내온 봉투를 가지고 오시더니,
"자, 니가 갖다 버린다고 했으니 이거 가져다 버려"
너무 어이가 없어 그냥 잠자코 휴대폰을 보았다. 그랬더니 밤 11시가 된 시간에 그 얼음팩들을 가지고
밖으로 홱 나가셔서는 분리수거함에 버리고 들어오셨다.
아...
황당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웃으며 시작했던 대화 아니었나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얼음팩 정리했다 다시 모으자고 한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강여사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리 곱씹어 봐도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내 기분은 더 나빠졌다. 다음날인 어제, 나는 강여사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여사 역시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일하러 나왔다.
그리고 오늘,
강여사의 기분은 언니 덕에 다소 풀려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언니는 말도 없이 집밖으로 향한 내게 문자를 보냈다. 내용인 즉, 기분 나쁜 티를 언제까지 낼 거냐,
다른 가족 불편하게 계속 그럴 거냐 등 핀잔의 메시지를 연속으로 퍼붓었다.
내 기분은? 엄마 기분만 기분이고 내 기분은 기분 아닌가?
엄마는 기분 나쁘면 딸내미 황당하게 행동해도 되고 딸은 기분 나빠 말도 없이 나오면 안 되는 건가?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더니, 내 기분은 아랑곳없이 엄마 기분 안 풀어 드리고
기분 나쁜 티 낸다고 핀잔주는 언니가 더 짜증 나 그런 문자 보내지 말라고 답 문자를 보냈다.
내 기분은 더 상했으니 날 내버려 두라, 문자로 옥신각신하다 언니랑도 싸울 것 같아
다투기 싫으니 그만하라 했다.
언니도 더는 싸움이 될 것 같으니 내 마음대로 하란 문자를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도 모르는 엄마의 기분을 매번 풀어드리는 것도 때론 지친다.
강여사는 뒤끝이 없고 금방 화를 푸는 타입이다. 싸워도 늘 먼저 화해를 하려 손을 내미시고, 종종 나중에 화가 났던 이유를 설명해 주어 납득이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삐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솔직히 '삐툴어질테다!'하는 마음이다.
내 말이 듣기 싫다고 하셨으니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왜 말을 안 하냐고 하는 건 모순 아닌가?
물론, 순수한 의도가 아니지만, 이번에 말을 안 하는 건 내 기분을 태도로 내보인 것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어제보다 기분이 나은 오늘이 되더라도 이미 나빠진 기분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뿐더러 기분으로 행동했던 것을 되돌릴 수도 없다.
후회하는 마음과 어쩔줄 모르는 어색한 태도와 분위기만 남을 뿐. 기분이 태도가 되면 엎질러진 물과 같다. 닦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만 쏟아진 물은 이미 없고 쏟아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깨끗하게 지워지지도 않지만, 악의 없는 순수한 물이었어도 마르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오늘은 내 기분을 태도로 여실히 보였다.
나도 기분 나빠요. 엄마를 사랑해도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예요. 그렇게 태도를 보이고도 나는 여전히 화가 나있다. 나도 참 못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 밤의 황당함이 화가 되어 가라앉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받은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 하지 않나. 그런 마음이 드는 날
오늘 밤에는 내일 아침에는 괜찮아질까, 내일 저녁은 그리고 설날에는 괜찮아지려나.
뒤끝 긴 딸이 엄마에게 길게 화내는 그런 날. 한 책의 제목이 자꾸만 떠오른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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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태도가 된 날,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를 어떻게 성찰할지 큰 숙제를 받은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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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강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