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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복 Apr 17. 2024

우울의 유산 -1-

자식은 아버지의 감성을 물려받는다

자식은 어머니로부터 지능을 물려받고,
 아버지로부터 감성과 직관을 물려받는다.

위와 같은 연구결과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본 바가 있다. 모든 일에 100%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주의지만 내 개인의 역사에서는 상당히 크게 공감 가는 바가 있다. 나의 이 끔찍한 우울이라는 질병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닮지 말아야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들이 지금의 나에게서 마치 거울처럼 비친다. 


나의 아버지. 나의 영웅이자 롤모델이었으며 나의 유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 극악무도한 폭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리디 여린 사람.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나도 원망했던 사람. 그것이 나의 아버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지금으로도 또 그 시절의 시대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해도 정말이지 기이한 행적을 보인 사람이 나의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의 다사다난했던 삶과 그 위태로운 감정들과 행동들에 대해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을 느낀다. 혹자는 절대로 있어서도 해서도 안 되는 행동들이며 인정해서도 안된다고 비난하겠지만 나는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아버지와 비슷한 불안과 혼란, 그리고 우울과 삶의 비애를 느끼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해주었던 삶에 대한 비관적인 이야기들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나 역시도 느끼고 있다. 마치 아버지의 감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은 나의 우울감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병적인 감정들을 살펴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또한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그의 아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물론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합리화할 수도 없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 가족을 돌보는 것보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는커녕 가정을 와해시켰다. 솔직히 말해 아버지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나 스스로 아버지와 화해해야만 했다. 그가 나의 아버지이며 나는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아... 그렇다. 내가 발버둥 치며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는 그의 아들이고 그는 나의 아버지이다. 이 저주받을 우울증마저 물려준 나의 아버지.




아버지 삶은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삶과 맞물려 있다. 마치 가문의 저주와도 같은 이 정신질환은 대를 이어오며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우울의 유산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인물과 체구가 좋고 성품이 제법 유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순함을 넘어 어찌 보면 좀 아둔하다 여겨질 정도의 인물이라고 들었다. 복잡한 사연과 사건들이 얽혀있겠지마는 증조할머니는 두 명의 남편을 두었다고 한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 첫 번째 남편이었고, 두 번째로 또 다른 남자를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증조할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들었다. 


아마 그러한 가정환경은 우리 할아버지로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겪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이며, 그런 기이한 가족 구성이 얼마나 흔하겠는가.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을 법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보기 드문 효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정환경과 사건들을 견디는 것은 어린 할아버지에게 큰 고통이었으며, 결국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거기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또한 있었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과 가정환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의미 있는 곳에 목숨을 내던지겠다는 감정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또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이게 된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터지자 자진하여 참전을 하게 되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이 적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목도하였고, 할아버지 역시 총상을 입어 손가락을 하나 잃으셨다. 또한 수많은 적군을 사살하였고 그 결과 국가유공자가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된다. 


어린 시절 가정으로부터의 상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내건 청소년기, 그리고 전쟁의 포화 속을 헤치고 온 할아버지는 제법 다혈질에 신경질적인 기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가족들이 식사를 하던 중 큰아버지가 무언가 잘못을 하자 '이 새끼가!' 하는 소리와 함께 젓가락으로 팔을 찔러 관통시키는가 하면, 어느 날엔 밖에서 누군가와 싸움을 하였는지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오시고는 낫을 꺼내 들고 멱을 따겠다고 집을 나선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늘 잠을 깊게 자지 못했으며, 죽임을 당한 전우들과 자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적군들의 귀신들이 자꾸 찾아온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제법 난폭한 모습을 많이 보이고 폭언과 폭행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예외였다고 한다. 형제들 중 유독 영리한 모습을 보이고 학업성적도 우수한 편이었으며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아버지의 말로는 할아버지에게 심하게 맞는 형들을 보며 항상 살아남기 위해, 또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했다고 한다. 덕분에 형제들 가운데 유독 총애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는 것은 매한가지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할아버지는 나한테 만큼은 무한한 애정을 한없이 주는 자상한 분이었다. 아마도 자식 중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낳은 자녀이며, 우리 집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을 하셨는고, 내가 사달라는 장난감은 그게 얼마이든지 사주셨다. 또 어린이집에 등교할 때면 늘 할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앉아 할아버지의 허리를 꼭 안고 갔던 기억이 난다.


이와 함께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은 막걸리 냄새이다. 늘 술을 드셨는데 날 것인 돼지고기 비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썰어가며 안주로 드시던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보기에도 그것은 제법 생경하고 좀 으스스한 느낌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상당한 애연가 셔서 담배를 늘 피우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 때문일까.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는 60세를 조금 넘긴, 지금으로 따지면 너무도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던 순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누워계시다가 제법 불편한 기색으로 토를 받을 것을 달라고 하시곤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 


6살 무렵 어린 시절의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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