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그게 제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선생님이신 어떤 남성분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 선생님이 습관적으로 던지는
'중고등학교 때 어떤 고민을 하면서 살았어요?'라는
질문에 저런 뜬금없는 진지하고 우울한 대답을 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진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남들 다 하는 가난이라지만, 그래서 진부한 가난이지만,
내 가난은 그림자 같았다.
희망에 가득 찬 가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지독히 가난했음에도, 무조건적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는 대책 없는 희망주의자였다.
건설회사에서 대출 관련 업무를 보다 뭔가를 깨우쳤는지, 사업을 하겠다고 뛰쳐나온 그다음 해 IMF가 터졌다. 꽤 큰 사업장의 공사를 수주해 나름 승승장구하던 상황에서 터진 IMF와 땅에 박혀버린 거대한 돌덩이 때문에 지연된 공사비를 막지 못해 결국 사채를 썼다. 가난의 시작이었다.
크게 잃어서 크게 따고 싶었는지, 빚은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혹은 그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아버지는 정직하고도 성실하게 건설 관련 일을 이어나가며 헛된 희망을 부풀려갔다.
그 시절 내가 주로 듣던 이야기는 '일산의 어느 부지에 얼마나 큰 아파트를 지으면 수수료로 받게 되는 돈이 몇백억'이라는 얘기였다.
종종 실감 나게 해 주던 아비의 이야기는 마치 정오에 뜬 해처럼, 짙디 짙은 가난의 그림자를 발 밑으로 숨겼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난을 희망으로 버텨냈다.
어머니는 지독한 생계책임형 자영업자였다.
대책 없는 희망주의자의 대실패를 온전히 떠안았다. 사채를 갚기 위해 모든 인채를 끌어다 썼다. 고금리의 일수를 썼다.
조그만 가게를 얻어 김밥과 같은 음식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채는 가게도 허락하지 않는다. 빨간딱지를 붙이러 쳐들어온 업자들, 빚 갚느라 쌀을 살 돈이 없는 밥집.
가게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뭐라도 해야 하니, 어차피 손님도 없는 가게를 놔두고 그 앞에 좌판을 깔고 튀김인지, 순대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음식을 팔았다.
나름 괜찮은 그 벌이로 리어카를 끌며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팔기 시작했다.
첫 3년간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를 했다고 했다.
지독한 절박함이 통한 걸까, 가게는 점점 입소문을 타더니, 동네의 떡볶이 명소가 되어 늘 북적였다.
그러나 빚의 그림자는 매일이 반복이었고, 어머니는 리어카를 끌며 버텨냈다.
지독한 가난은 일상을 덮어버린다.
돌이 굴러오는 공황도,
고등학교 시절 전체가 통으로 기억나지 않는 것도,
부모에게 거절 한번 해보지 못하고 착한 아들로 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가끔은 가난 때문이라고 애써 탓을 해본다.
그래서 잘 살고 싶었다.
한 명의 성인으로서 스스로 잘 성장하는 게 부모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 살아내는 게 효도'라는 말을 믿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가난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 없어 미안하고, 무시받는다는 모욕감을 느끼고, 기대하고, 분노하고.
결국 갈등의 모든 시작은 '돈'이었다.
단절의 이유가 돈 때문이 아님을 여러 번 이야기했으나,
결국 돌고 돌아 돈이었다.
내가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는,
몇십 년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린 가난의 흔적이었다.
나는,
지독히 가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망각했다.
돈을 원망한다. 그리고 갈망한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부모가 안쓰럽다.
모든 이유를 돈으로 돌려지는 상황이 답답하다.
'가'족으로부터의 '감'정을 가감 없이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