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만난 나
미국에 왔다.
이곳 서배너는 한국으로 치자면 바닷가를 옆에 낀 조용한 항구 도시이다.
내가 40여 일을 머물 동네는 그중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
조카들이 학교에 가고,
처형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던 호수로 우리를 안내했다.
호수에 악어가 산다. 그렇다고 별 다른 안전장치는 없다.
햇살이 매우 따뜻했다.
바람은 살랑살랑 시원한 늦가을 감촉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호수 한 바퀴를 도는데,
여유로웠다.
파이브가이즈에 갔고, 코스트코에 갔다.
버거는 크고 자극적이었으며, 땅콩과 감자튀김은 짜고 자극적이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스치듯 지나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고, 혹시라도 실례를 하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영어에 무지한 나는,
또 서양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있는 나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익숙하지 않은 살핌은 매우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여유로웠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내 마음이 느낀 건 여유로움이었다.
다른 문화의 환경 속에서 내 몸은 긴장하고 있었다.
몸. 그리고 마음.
나를 이루는 두 요소의 간극이 오묘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넘어가자,
몸이 콧방귀를 뀌듯 기지개를 켜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직 여유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시차적응은 몸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음은 벌써 여유로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몸이 준비가 안된 것.
여행을 떠나오며 새로운 환경에서의 일상을 즐기기를 기대했는데, 그것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이다.
비행기로 시간을 거슬러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는데,
몸은 여전히 이동 중이었구나.
특히 방광과 위장이 두드러진다.
수면과 함께 잠들어 쉬어야 할 방광이 자꾸 움직이며 날 깨운다.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 새벽이 되면 위장이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이 녀석들에게 시간이 필요하다.
단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겠지.
이 기다림의 시간 역시,
가만히 나를 바라보게 만들어준 시차적응의 산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