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이직러의 슬럼프
이직을 자주 하던 시절에는 슬럼프를 크게 겪어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짧으면 일 년 길면 이년을 다니고 철새처럼 이직을 했고
그 사이사이 쉬며 짧게는 2주에서 한 달가량을 쉬며 여행도 다녀왔다.
슬럼프가 한두 번 오면 퇴사를 했던 것 같다.
회사 생활을 하며 나의 신조는 출근하기가 너무너무 싫으면
그리고 이런 날이 여러 날 반복되어 인생이 불행하다 느껴지면 그땐 퇴사하자! 고 기준을 세워뒀으니까.
지금 회사는 육 년을 넘게 다니고 있는데
최초로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닌 직장이 아닐까.
(좀 더 인내를 배운 자신을 작게 칭찬한다)
처음은 2년 즈음 됐을 때 왔던 것 같고
그다음은 3년 즈음. 그다음부터는 반년에 한 번 혹은 조금 더 잦게 왔다.
슬럼프는 K.O의 순간 찾아왔다.
작은 펀치를 수 없이 맞아 K.O를 당하기도
어쩔 때는 강한 어퍼컷에 한방에 링 밖으로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또 round1을 넘겨도 이미 부상 상태라 round2, round3 라운드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더 쉽게, 더 빠르게 쓰러진다.
쉴 만큼 쉬고 새경기(이직)에 나가는 게 아닌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이 슬럼프를 지나친 방법*은 다양한데 아직 대표님 앞에서 퇴사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으므로
내적인 동기부여로 마음을 여러 갈래로 다스리며 지나쳤다.
(*이제 보니 극복이라기보다는 그 시기를 지나쳐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안식 휴가로 보름 남짓 여행도 다녀와봤지만 잠깐의 쉼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두세 달이면 모를까. 보름이란 시간은 이도저도 아니어서 오히려 휴가가 끝날 때쯤 더 처절히 출근하기가 싫었다.
나의 갈래들은 늘 달랐지만 몇 가지를 요약하자면
1) 한 달만 버틴다
세 달만 버티자. 저거까지만 하자. 하다 보니 오 년을 넘게 하고 있더라. 맡은 책임이 있으니
그래 두 달 뒤에 있을 인사 평가까지 하고 관두자
세 달 뒤에 대대적인 리뉴얼까지만 보고 관두자
흔들리는 조직만 안정화시키고 관두자. 서너 달이면 될 거야
이러다 보니 그 시기를 지나친 것 같다.
2) 처음부터 다시
목표(KPI)를 새롭게 잡았다.
지금 KPI가 100%로 동의되지 않아서 오는 괴리감, 현타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회사의, 조직의 방향, 현재 우리 회사에 필요한 단계, 미리 준비해야 할 것 위주로 대표님과 여러 번 논의를 거쳐 KPI 자체를 재수립했다.
내가 만든 목표니 힘이 났다.
3) 겁낼 시간에 빠르게
조직 개편.
Top-down으로 조직 구조가 바뀐 적이 있었는데 모든 조직 구성원이 동의하기 힘든 방향이었다. 나도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했지만 워낙 경영진 의지가 강해 내가 뜻을 굽혀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개편한 지 한 달 만에 누수가 여기저기 생기다 못해 댐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 됐고..
침잠하고 탓하기보다는 빨리 소생시키는 게 중요하니 짧은 결과를 들고 다시 조직을 구상해서 개편한 지 두 달도 안되어 다시 조직을 재개편해버렸다. 대혼돈의 시기.
사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게 늘 최선의 정답은 아니다.
앞에는 더 좋은 기회가 기다릴 수도 있고
어쩌면 힘든 마음의 마지막 몸부림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몸은 갈아 넣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자신을 끔찍이 여긴다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상, 시장 상황상,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계속 이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슬럼프를 지나쳐야만 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원래 어떻게든 지나쳐 오고 나면 사람들은 그걸 ‘극복’했다고 말하더라.
오늘의 해는 이미 떴다.
또 하나의 하루를 나름대로 열심히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