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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완짹슨 Dec 20. 2021

저요? '한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대만에서 나의 두 번째 직업

"상헌 씨는 대만에서 뭐 했어요?"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들과 만나면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였다. 물론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지만 보통은 굳이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 이유는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직함이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 넘는 대만 생활 중에서 한국어 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대만에 온 지 약 2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후였다.



<대타 선생님으로 시작된 수업>

가오슝에 거주하던 시절이었다. 가오슝은 대만에서 타이베이 다음으로 큰 도시였지만 서울과 부산이 그런 것처럼 타이베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이었다. 그래서 활성화된 한국어 학원은 딱 1개뿐이었고 1:1 과외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가뭄에 콩 나 듯했다. 즉,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포기하며 살아가던 찰나에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상헌 씨? 한국어 수업할 수 있어요?" 가끔 교류 차원에서 나가던 한인 교회에서 알게 된 분이 전화를 주셨는데 급하게 한국어 선생님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앞뒤 사정을 듣고 보니 이번에 대만 몇 개 학교장과 협의 하에 한국어 수업이 개설되었고 선생님들 섭외도 다 되었는데, 선생님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작스럽게 귀국을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생략하겠다) 어쨌든 개강을 1주일도 안 남기고 급하게 한국인 선생님이 필요해서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은 것이었다. 너무 얼떨결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016년 9월, 어쩌면 나는 한류의 수혜자였다>


수업은 매주 화요일 양일간에 걸쳐 총 6시간이었는데 화요일의 경우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내리 4시간을 수업을 했었다. 쉬는 날을 평일로 대체하고 주말을 포함한 나머지 날에는 가오슝 쇼핑몰에 오픈 한 한국 퓨전 도시락 브랜드의 직영점 관리를 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셰어 하우스(원래는 한국 선생님들이 지낼 숙소였는데 일방적인 귀국을 하는 바람에 월세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되어서 셰어 하우스로 역제안 후 시작)를 청소해야 했고 초보 집사로서 고양이 2마리까지 키우던 어쩌면 대만 생활 중에서 제일 쉼 없이 달렸던 시간이었다. 중간에 약간의 위기? 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교감을 쌓으며 열심히 달렸더니 짧고도 길었던 한 학기가 끝나고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어느덧 방학이 찾아온 것이다.


방학은 학생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오랜만에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갑자기 수업을 안 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은 달콤했고 자유로웠다. 방학 중간에 3일 정도 '단기 특강과 한국 문화 체험 행사' 에도 선생님 자격으로 함께 하기는 했지만 짧게나마 한국을 다녀 올 여유도 생겼다.


열심히 해서였을까? 아니면 잘해서였을까? 이후 2학기를 앞두고 자연스럽게 연장이 되어서 2학기에는 새로운 친구들과 인연을 맺고 한 학기 아니 1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감사장까지 받을 수 있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은 나였는데 말이다.

<학교에서 받은 감사장,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였지만>


<1년 후, 타이베이로 이사를 하다>

그렇게 가오슝에서 1년간 수업을 한 이후에는 회사에서 담당 업무가 바뀌면서 타이베이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가오슝에서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나의 두 번째 직업'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꼈기에 이 일을 계속하면서 머물고 싶었지만 이것이 나의 생존까지 보장해 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떠나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운이 좋아서였을까? 타이베이에서 줄곧 기회들이 찾아왔다. 가오슝에서 1년간 가르친 경험을 이력 삼아 나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첫 번째는 신베이에 위치한 창성 기술 대학교 한국 문화 동아리에서 수업이었다. 동아리에서 외부 강사를 초대(그게 나였다)해서 수업을 하면 외부 학생들이 참관이 가능한 형태였다. 중간에 한 번은 한국 요리 수업까지? 맡아서 했었는데 떡볶이를 대량으로 만드는 것은 학생들도 나도 처음이어서 참 쉽지 않았던 하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욕심으로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수업이 아닌 날에도 만나서 같이 재료를 사러 가고 사적인 대화와 장난도 치며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들은 행복 그 자체였다. 이실직고하자면 한국 문화 동아리 간부들이 총 7명이었는데 전부 여학생이었다. (솔직히 그래서 더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많이 '아주 많이' 말이다)

<학생들은 자음, 모음 수업보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 창성 기술대학교에서 >


두 번째 이야기 끝.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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