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셰어 하우스 (결심부터 시작까지의 이야기)
몇 번의 재촉과 설왕설래가 오고 간 끝에 보증금(내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떼이고)을 돌려받음으로써 3년간 운영했던 셰어하우스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월세 한번 밀린 적 없었고 집주인에게 누 될 일 없도록 노력했지만 마무리는 시작처럼 좋게 끝나지 못했다. 더 안 좋게 끝내는 방법도 많았지만 "일을 더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현실적인 공감을 하며 시내와 시외를 오가는 버스 노선 같은 인생에서 이번 일은 그저 수많은 정류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담들을 양념이나 MGS 없이 담백하게 정리해서 브런치라는 공간에 담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 독자들이 맛있게 읽어주기만 하면 될 터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3년 동안 대만에서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그리고 셰어 하우스 속에서 스쳐간 인연부터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들과 마지막으로 입주부터 보증금 돌려받기. 까지 3년 동안 셰어 하우스 하나로 경험한 다양한 일들을 에피소드 별로 정리해서 올릴 계획이다.
이 집은 '5년 넘는 시간 동안 10번의 이사를 하면서 6번째로 이사한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https://brunch.co.kr/@kingka840625/11 (이 이야기를 참고함이 좋을 듯하다)
덧붙이자면 한 달 만에 나와야 했던 5번째 집주인(정확히는 대만 회사 법인 명의로 된 집이며 집주인이라는 자는 회사 대표의 친인척으로서 집주인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그것이 힘들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이다)의 다른 집이다. 보통 이런 경우는 부동산을 통해서는 매물이 없고 건너 건너 알게 되어 주변 시세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때문에 입주를 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장점보다 큰 단점들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일교차가 크던 11월의 어느 날 늦은 밤 집주인 그리고 집주인을 소개해준 분과 나까지 3명이서 집을 보러 갔다. 집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살기에는 적당한 크기였다. 그래도 위치는 가오슝에서 제일 부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고 (그냥 이 동네에서 살아 보겠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기에 마음이 들떴던 기억이) 제법 큰 상권이 형성된 2개의 지하철역이 도보로 10분 이내로 위치한 꽤나 좋은 위치였다. 대만에서 뚜벅이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적합했고 입주자 모집할 때 소위 말하는 역세권은 꽤나 좋은 홍보 수단이었다. 가구가 많이 없는 게 아쉬웠지만 시세보다 저렴했기에 아낀 돈으로 여유가 있을 때마다 IKEA 매장에서 괜찮은 녀석들을 가져오면 될 터였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2층이었기에 계단으로 몇 걸음 옳기니 대문이 보였다. 대문을 살짝 밀었는데 상상했던 거실 대신에 야외 베란다가 등장을 했고 베란에서는 거실이 보이는 구조였다. 다시 한번 창틀을 옆으로 밀어내고서야 거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겨울이 없는 가오슝이지만 그래도 1년 중에 제일 추운? 시기여서 그런지 아니면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흔적 때문인지 바닥에서는 적막한 느낌을 풍기는 냉기가 올라왔는데 이는 어둠 속에서도 대만 날씨를 고려해 깔아놓은 대리석 바닥임을 직감했다. 나는 이미 이런 대리석 바닥에 익숙해진 터였다.
밤에 집을 보여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곳이 낮에 해가 잘 들지 않는 방향이구나. 하는 건 어느 정도 감안하고 불을 켰는데 와인 한잔 따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조명 속 거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분위기였다. 큰 하자가 없으면 입주할 생각이었으므로 온수 사용 가능 여부 같은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 후 곧바로 계약 의사를 나타내었고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약간의 월세 할인을 시도해 봤지만 주변 시세보다 20만 원 넘게 싸게 나온 곳이라서 그런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어지럽게 헤쳐있던 짐들도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여러 가전제품들도 켜 놓으니 냉기만 느껴지던 집에도 온기가 들어 차고 시간이 지날수록 집구석 같은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초 만실이라고 하기엔 3개밖에 안 되는 작은 집이었지만 마지막 방에 손님이 입주하면서 나는 입주 1개월 만에 만실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을 'LALALA HOUSE'라고 지었다. 사실 망고를 좋아해서 MANGO HOUSE라고 하고 싶었지만 특별히 LALALA로 하게 된 이유는 타지에서 셰어 하우스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운영하는 숙소 이름을 따로 저작권료 없이 가져와서 쓰게 되었다.
셰어 하우스와 게스트 하우스 사이에 공간으로 생각하고 계약을 했지만 상업적 용도보다는 사람들과 국적과 성별 상관없이 더불어 살고 교류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시작했다. 물론 이 동네에 살아보겠다.라는 강한 욕구와 더불어 말이다.
세상 모든 관심사는 결국 돈 문제로 연결이 되기에 정리한 내용이다. 솔직히 나는 셰어 하우스를 영리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기에 수입과 지출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록해 둔 장부가 없기에 기억나는 범위 내에서 큰 오차 없이 정리를 해 보았다.
- 고정 비용 : 월세 한화 약 67만 원 + 관리비 약 7만 원. '합계 74만 원'
(주변 시세보다 20만 원 낮게 계약한 금액)
- 변동 비용 (전기, 수도, 가스, 인터넷, TV 등) : 고정 비용이 아니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12만 원
- 월평균 운영 비용 약 86만 원 발생
- 1년 단위로 계약하면서 3년 동안 월세 인상은 없었으나, 대만 내 최저 임금 인상에 따라 관리비 한화로 약 7,000원 정도 인상되었으나 큰 영향은 없었다.
이것을 수익화하려면 방 3개를 30만 원 이상은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했다.
- 큰 방(화장실 포함) : 39만 원
- 중간 방 (화장실 공용) : 29만 원 (처음에 내가 살던 방이기도 하다)
- 작은 방 (화장실 공용) : 26만 원
합계 약 94만 원. 여기서 운영 비용 86만 원을 제외하면 약 8만 원이 남는다. 물론, 2명이 입주를 할 때면 추가 요금을 더 받은 적도 있어서 그 이상의 수익이 날 때도 있었지만 공실율로 인한 손해도 고려하면 사실상 수익성은 0점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돈만 보고 시작했다면 결코 3년이라는 시간을 운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수익 없이 3년이라는 시간을 운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셰어 하우스 운영에 대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념이란 그저 더불어 살고 싶었고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었다. 처음에 입주 1세대로 함께 살게 된 대만 친구 디디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그저 동물원 같은 사각형 모양의 집에서 혼자 살고 싶지는 않다'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폭넓은 사고와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돌아온 그녀에게 작은 사각형은 비좁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친구들을 적재적소에 만날 수 있었기에 시작할 용기도 낼 수 있었다. 어쨌든 공실율이 길어지면 비용적으로도 부담이었기에 시작을 함께 하겠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게 용기를 실천하게 해 주는 행운이었다.
'함께 사는 사람이 없는 혼자 사는 셰어 하우스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후에도 공실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 (그 와중에도 '공실을 막기 위해서 삶의 방향성이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도록 노력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제는 정말 수많은 내적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였고, 동시에 다른 곳에서 모여든 각자의 인격체들이 한 곳에서 잡음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사람 속이라는 게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빙산의 한 끝자락만 보고 판단하는 나의 어리석음과도 같았다. 세상은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분배해주지 않았고 때로는 노력 대비 헛수고에 가까운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서 좌절하는 법을 잊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혼자 살면서 뱃살이 찌는 것보다, 같이 살면서 생각이 살찌고 마음이 살찌는 것이 즐거움이었고 그 배경에는 셰어 하우스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