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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완짹슨 Oct 22. 2019

대만에서, 5년간 9번의 이사

평생 할 이사는 대만에서 다 했다.

세상에서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 없다고 하지만 특히나 연고 하나 없는 나라에서 보금자리를 구해서 사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누군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나도 일단 가면 그들처럼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그건 그 사람들의 결과만 보고 판단해 버린 나의 오류였다. 결과보다 중요한 과정들은 생략을 해 버린 후 결과물과 마주했을 때 그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대만에서 5년 동안 이사만 9번" 

이 이야기는 수많은 현실에서 마주한 여러 사례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나의 글은 '힘듦' 보다는 '추억'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적으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나처럼 해외 살이를 희망한다면 조금은 진지하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에서 이사라고는 어릴 때 몇 번 해본 것이 전부이고 그마저 어릴 때라 내가 하는 일은 이사가 끝난 후에 노란색 단무지와 함께 짜장면을 먹는 것뿐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사라고는 내가 인도에서 장기간 파견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가 유일했다. 가족들은 20년 넘게 살았던 동네를 떠나 이미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시간은 인도로 가기 전으로 멈춰 있었기 때문에 돌아온 이후에도 20년 넘게 가끔은 눈 감고도 걷던 거리를 지나서 집으로 가야만 할 거 같은데 카톡으로 새로운 집주소를 건네받고 가본 적 없는 동네로 버스를 타고 어딘가에 내려서 처음 가보는 아파트로 들어가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 갈 때 남의 집에 들어가는 듯한 낯선 느낌을 느낀 게 벌써 5년 전이다.


그런데? 대만에서는 5년 동안 이사를 너무 많이 해서 이제는 이사 회사에서 수습 기간 없이 일 해도 될 듯하다. 게다가 대만에 처음 오는 분들에게 해외 이사 혹은 집 구하기 노하우도 상세히 알려줄 경지에 이르렀다. (새 집 계약 시 주요 검토 사항 , 간단 포장, 저비용 이동 수단 확보 등)


9번의 이사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설레는 시간도 있었고 때로는 원하지 않던 이사 때문에 미치도록 짜증이 나서 씩씩 거리면서 이삿짐을 포장하고 나른 적도 있었다. 회사를 퇴사한 후 스스로 대만행을 선택했을 때 5년이라는 시간을 버틸지도(이건 주변에서 더 놀라워함) 몰랐고 그 시간 동안 9번의 이사를 하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시작하는 성격이 아니라 일단 덤비고 보는 나에게 이런 결과는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재탄생할 수 있음에 그 순간들이 고맙기도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럼 지금부터 5년간 9번의 이사 이야기를 최대한 압축해서 시작해 본다



첫 번째. 회사 주재원으로 대만 생활 시작. 대만 생활 초기 유일한 안식처. 

지금이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행으로 대만을 처음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의 경우는 주재원 생활로 대만에 처음 오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에서 귀국한 후 급하게 대만 법인에 합류하게 되어 이 곳에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집을 구할 여유가 없었고 중국어로 가득한 간판들은 앞으로의 생활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알려 주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첫 번째 집은 어쩌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게 된 곳'이다.

하지만 9곳의 집에서 살아 보니 첫 번째 집은 꽤 괜찮은 집이었다. (소중한 건 항상 뒤늦게 깨닫는 법이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혼자 거주하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사용하던 안방을 제외한 작은 방 하나는 7개월 동안 사용한 적이 없어서 가끔 정리하기 귀찮은 녀석들을 쌓아두는 용도로 사용할 정도였다. 화장실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지만 드론이 날라 오지 않는 이상 누가 볼 수 없는 위치여서 환기를 좋아하는 나는 작은 창문을 늘 열어두었고 쾌적한 화장실 사용을 만족해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바로 거실 뷰였다. 사실 늦은 밤 선택의 기회가 없는 계약을 했고 사인 직후 급한 대로 까르푸에서 이불과 베개를 구매한 후 그대로 첫날밤?을 조금은 울적하게 보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와 보니 아침 햇살이 거실을 환하게 비추어서 불을 따로 켤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햇살이 주는 포근함이 너무 좋았는데. 집에 고양이들이 있었으면 아마 그곳에 계속 머물렀을 것만 같은 따뜻함이었다.


창문을 열어 보았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푸른 하늘과 구름이 어울려 둥둥 떠 다니는데 그 풍경을 보고 있느라 눈에 눈곱이 붙어 있는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맞은편 건물의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 건물은 3층짜리 단독 주택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나는 11층으로 지어진 건물의 10층이었다. 거실에서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뭔가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이 밀려왔다. (예전에 TV 방송에서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전혀 안 보이는 고층 건물의 창문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나는 그 집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핑계 삼아 나는 거실에서 종종 나체로 다닌 적도 있다. 그때의 느낌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브런치 심의에 걸릴 수 있으니 구체적인 상황은 생략하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접근성과 주변 분위기도 적당히 좋았다. 집 앞에 큰 대로에서 버스를 타면 15분 만에 회사에 도착을 했고 늘 자리가 많아서 서서 가는 법이 없었다. 가오슝에서 제일 큰 백화점과 실내 수영장이 딸려 있는 초대형 헬스장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고, 집 바로 옆에는 어린이용 야구장이 있었는데 주말을 제외하고는 늘 조용했다. 주말에는 알루미늄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소리에 단잠을 깨우기는 했지만 가끔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가오슝에서 제일 큰 야시장과 인근 지하철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어서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대만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사실 어딜 가든 잘 적응하지만)

 

동료 주재원 에피소드 :

실내 인테리어가 궁전 같았던 집을 선택한 다른 동료는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왜 이렇게 컴컴하지?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사방이 다른 건물에 막혀 있는 집이었다. 그 역시 나처럼 밤에 집을 보고 계약을 했는데 밤에 본 그 집은 정말 궁전 같았다. 그런데 아침은 그냥 음침한 기운이 도는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집 구할 때는 낮에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현실감 있게 배웠다. 

하지만 나는 대만 법인으로 발령받은 지 7개월 만에 한국으로 귀임을 하게 되어 첫 번째 집에서의 추억은 딱 여기까지였다. [약 7개월 거주. 월세 : 한화 약 60만 원]



두 번째. 퇴사 후 대만 도착. 떠돌이 생활의 시작

나는 대만에 계속 있고 싶었고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택하기로 했기 때문에 본사로의 복귀는 곧바로 퇴사로 이어졌다. 7개월 전만 해도 "대만이 어디예요?"라고 말하던 내가 대만에서 자리 잡고 살아보겠다고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것이다. 회사에 계속 있었다면 다른 국가로 인사 발령이 날 수도 있었고 부족하지 않은 급여를 받으며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브런치에 대만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퇴사 후 다시 대만으로 향했다. 당장은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지출만 발생을 하니 자연스럽게 집값은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었고 예산에 맞춰서 집을 구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어려웠다. (여기서부터 진짜 내가 선택한 고생의 연속이었다) 어학당 개강일은 다가오고 첫 번째 집을 떠나며 맡겨 놓은 짐도 계속 신세를 지기 미안해서 급한 대로 건너 건너 계약 기간이 2개월 정도 남아 있는 집을 양도받았다. 일단 이 곳에서 지내면서 고민을 하기로 했다.


이곳의 집은 위치는 번화가에 위치해서 괜찮았지만 집이라기보다는 방 하나가 전부였다. 방 하나에 작은 화장실이 있는 게 전부였다. 부엌은 없었고 연식이 있는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내가 임시로 거주할 곳은 4층이었는데 이사할 때 이사 박스가 너무 커서 앞을 안 보고 감으로 4층 계단을 오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더위가 여전히 가시지 않았던 9월 초. 그때 오르락내리락할 때 흘린 땀의 양은 머리를 감아도 될 정도였다.


꽁위(公寓: 사전에 사글세 여관, 공동 주택이라고 나옴)라고 하는 이 건물은 사실 대만에서는 흔한 편인데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예를 들어 라면 하나 먹는 것도 일이었다. 주방이 없다 보니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고 주방 용품 같은 것을 올려 둘 선반도 없었다. 나중에는 설거지가 힘들어서 라면이 먹고 싶을 때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대체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집에서 끓여서 계란 넣고 먹는 그 맛에 비할 수는 없어서 나중에는 그마저도 먹지 않았다.

조금 큰 고시원 방 같은 곳. 그래도 이 곳은 임시 거처라는 생각에 정말 필요한 짐 이에는 풀지도 않으며 매일 밤 수많은 이사 BOX를 보며 잠이 들었었다. 7개월 동안 뭘 그리 많이 삿는지 BOX가 꽤 많다. 아이쿠야.

[임시 거주 기간 약 1.5 개월. 월세 약 25만 원]



세 번째. 작지만 주방이 있는 집으로 입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방이 없는 집에서 지내니 집밥 마니아였던 나는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외국인들 입맛에 맞게 집을 찾아주는 친구를 통해서 내 입맛에 맞는 집을 구했다.


어림 잡아 15평도 될 듯 말 듯 한 그리 큰 집은 아니었지만 1층에 관리실이 있는 따로우(大樓: 빌딩, 고층 건물)였다. 첫 번째 집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었지만 가오슝의 명소 '아이허(愛江 : 한국말로 사랑의 강)'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서 밤에 운동 겸 산책하기 좋은 위치였고, 지하철은 뛰어서 가면 20초 만에 도착하는 초 역세권이었다. 그런 만큼 월세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무리해서 계약한 사연? 이 있는데 처음에는 대학교 어학당 주변으로 월세 20만 원 정도 하는 집을 찾고 부푼 기대를 안고 방문했지만 정말 사진이랑 이렇게 다를 수가?라는 생각에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싸잖아"라는 이유를 위로 삼아서 입주 합의를 하고 다음 날 계약을 하러 방문했는데 비가 무척이나 내리던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 비가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거주하기로 한 방에서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는 것이었다. 사소한 것에도 미안함을 느끼는 나는 그날만큼은 미안한 마음도 못 느낀 채 계약 안 하겠다. 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오히려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날 하늘이 비를 안 내려주었다면 나는 이 집을 계약했을 것이고 자다가 알 수 없는 소리와 촉촉한 촉감에 일어났을 것이다.


저렴한 이유가 누수였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6개월이나 살 자신은 없었다.

결국 비싸기는 해도 학교와도 가깝고 지하철은 걸어서 넘어지면 닿는 위치에 있는 집을 구 했다.

대신 주방이 있으니 외식보다는 집밥을 해 먹으면서 생활비를 절약하고 중간중간 싱글 방을 단기

임대 형태로 운영하면서 비용도 절감을 하면서 최초 계약 기간 6개월 + 6개월 총 1년을 채웠다.

[계약 기간 최초 6개월 만료 후 6개월 연장. 월세 약 42만 원]

                                  <집밥이 중요한 이유는 너무 많아서 생략>



네 번째. 50평짜리 빈 집에 방 하나만 계약해서 입주 한 사연.

1년 정도 살다 보니 익숙해져서 계속 이 곳에 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가오슝을 구석구석 알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기에 가오슝 안에서도 다양한 동네에서 살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때마침 가오슝에서도 살아보고 싶었던 동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동네 이름도 '문화 중심 文化中心'이다. 가오슝 사범대가 근처에 있다 보니 주변에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했고 맞은편 광장과 공원을 중심으로는 콘서트 홀과 문화 회관도 있어서 크고 작은 연주회가 열리는 날에는 그 주변 광장과 거리는 사람 사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타지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최소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어쨌든 그들 사이에 끼여서? 사는 것이다. 중국어를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니까! 어떻게든 어울리기 위해서 노력해보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이 집에 입주하게 된 계기를 간략하게 적자면 가오슝에서 알게 된 한국분이 한국어 선생님들 기숙사 형태의 용도로 50평이나 되는 집을 계약하셨는데 계획하셨던 일들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공실 상태로 매달 월세만 나가고 있다고 하셔서 "그럼 방 하나만 제가 렌트해도 될까요?"라고 해서 계약이 되었고 남은 방 2개는 저처럼 살 의사가 있는 입주자나 단기 여행자를 모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했고 OK라는 답변을 받았다. 수익금의 일부를 받기로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럼 한국분은 고정으로 빠져 나가는 임대료를 해결할 수 있었고 나는 돈을 최대한 적게 들이고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게스트 하우스 & 셰어를 운영해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청소는 내 몫이었다. 50평짜리 집을 한번 쓸고 닦고 하면 진이 다 빠졌지만 내 돈을 안 들이고 셰어 하우스를 운영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15층 건물 맨 위층에서 동네 뷰를 볼 때면 이사를 잘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불과 한 달에 불과했다. 한국분이 집주인과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집주인이 어떠한 이유로 먼저 해지를 제안했으니 보증금을 안 날릴 수 있었고 한국분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때 이미 대만 친구 한 명이 입주를 확정한 상황이었음)

그리고 나에게 미안해하시면서 대안을 제안하셨다.



다섯 번째. 한 달 만에 이사한 곳은 다름 아닌 같은 건물 3층? 

그렇게 같은 집주인의 건물 3층으로 이사를 했다. 층수는 달랐지만 평수는 같았고 이전처럼 방 한 개만 임대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3층에 위치한 집은 소음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전처럼 멋진 뷰도 없었다.

게다가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흔적이 느껴졌고 전반적으로 집 안이 수리가 필요한 곳이 많아 보여서 셰어 하우스 입주자 광고를 하기에는 부적합해 보여서 일단 한 달 안에 집을 구해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계획에 없던 이사다 보니 물건을 포장하고 다시 꺼내고 또 옮기고 하는 것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갑질을 해도 돈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쓰는 사람이 하기 마련인데 나는 내가 돈 쓰면서도 완벽한 을 그 자체였다. 나가라면 한마디 대꾸 못 하고 나가야 하는 을.  

(4번, 5번 집 월세 : 50 평하는 집의 월세 가격은 90만 원이나 방 한 개만 25만 원에 렌트)



여섯 번째. "꿈은 이루어진다" 가오슝 제일 부촌 지역으로 입주

'지금이야 한 달 살기가 유행'이지만 그 당시 내게 한달살이는 아주 고문 그 자체였다. 짐은 최대한 풀지 않으려고 했지만 막상 필요한 것을 찾으려면 이 박스 저 박스 헤집기가 일쑤였다. 그래서였을까? 갑작스럽게 집에 대한 욕심이 생겨 낫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그래 봤자 월세살이를 벗어나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계약하고 싶었다.

때마침 이전에 셰어 하우스 광고를 보고 왔던 대만 친구가 이사를 하더라도 합류를 하겠다고 해서 집을 구하는데 속도가 붙었다. (아무래도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려면 큰 집을 계약해야 하는데 초기에 입주자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 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미 시작 전부터 입주가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이 곳에서 살 거야"라고 말했던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관리비 포함해서 고정 비용만 월 74만 원(주변 시세는약 90만원)이 필요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집도 한 달씩 살았던 위에 두 집과 집주인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집이 몇 개 세요?)


확실히 이전 집들과는 달랐다. 1층에는 관리실이 있었고 2번의 보안 출입문을 지나야 만 정원이 보이는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원이 보이는 입구로 들어서니 연못이 보이고 물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머지 공간은 주민 휴게실과 나에게는 필요 없는 어린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집은 내가 3년째 운영하고 있는 셰어 하우스이기도 하다. 2016년 11월에 계약했으니 곧 있으면 3년이 된다. 야시장과 지하철이 가까워서 방 한 개 정도는 한인 게스트 하우스를 고려했지만 단기 손님이 오고 떠날 때마다 집에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셰어 하우스 식구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1개월 정도 공실로 돌아가던 마지막 방은 어느 한국인의 차지가 되었다. 사실 셰어 하우스를 하면서 참 재미있는 일들 또 어려운 일들도 많았는데. 이 이야기는 이번 이사 편 주제와 어울리지 않으므로 "대만에서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따로 글을 써 볼 계획이다.

나는 이 곳에서 약 1년 3개월 정도 거주를 했다. 그리고 회사 일로 인해 타이베이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나는 1년 넘게 살던 이 집 계약을 해지하는 대신에 내 방에 살 사람을 구했고 내가 없는 상태로 셰어 하우스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방 3개 화장실 2개 월세 + 관리비 약 74만 원]

<셰어 하우스의 마스코트. 왼쪽부터 "망고와 감자" 지금은 수컷인 망고가 성묘가 되어서 감자보다 더 크다>



일곱 번째.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로 이사. 

우여곡절 끝에 타이베이에 있는 어느 한국인이 운영하는 셰어 하우스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이 곳은 번화가에 위치하여 한국 여행객들의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이 되던 곳인데 여행객들의 예약률이 떨어지면서 장기 입주자를 모집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월세가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타이베이에서도 최고 번화가 중 한 곳. 쫑 샤오(忠孝) 역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가오슝에서 타이베이로 이사를 준비하면서 너무 지쳐 있어서 집을 보러 가기 전부터 나는 정말 큰 하자가 없으면 그냥 살 생각이었다. 


다행히 이전에 한인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이 되던 곳이라 집안 분위기는 아늑했고 주방이 있어서 집밥을 해 먹기에도 적당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빨래 건조기를 보고 생각은 확신을 주었다.

이유인 즉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어떤 분이 남긴 한마디가 떠 올랐기 때문이다. "빨래가 안 말라요" 그 한마디에 가오슝에 사는 나는 '타이베이의 미친 집값'과 '서울만큼이나 복잡한 거리' 마지막으로 '빨래가 안 마르는 습한 날씨' 때문에 타이베이에 살기 싫었지만 2년 가까이 살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이 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제로 돌아와서 화장실이 포함된 큰 방에는 간혹 한국 여행객들이 오고 갔지만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거실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안마 의자가 있어서 틈이 날 때마다 안마 의자를 즐겼다.

그렇게 이 동네의 동선이 익숙해지고 집안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지금은 형 동생으로 지내는(참고로 내가 형) 셰어 하우스 운영자가 대뜸 술 한잔을 하자면서 비싼 술을 가져오더니 꺼내는 이야기가. 


"형님, 이 집을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그때가 가오슝을 떠나 타이베이로 이사 온 지 3개월 정도 된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인 여행객들이 머무르는 큰 방의 회전율이 높지 않아서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나면 실질적인 수입은 없는 상황에서 재계약 기간이 다가왔던 것이었다. 지금은 동생이 되어버린 운영자 친구는 재계약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나도 가오슝에서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바로 맞은편 건물에 운영 중인 숙소가 하나 더 있는데 그곳으로 이사 제안을 받았다.

더 다행인 것은 그곳에도 건조기는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능숙하게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최단거리 이사였기에 이사도 금방 마칠 수 있었다.

[셰어 하우스 방 1개 기준 60만 원 , 전기 및 수도세 포함된 금액 화장실은 공동 사용]



여덟 번째. 한 달 살이, 삼 개월 살이 전문가로 진화중

맞은편 건물로 이사였기에 크게 어려운 건 없었다. 1층 관리실에서 수레를 빌려서 몇 번 나르니 이사는 금세 마무리되었고 이전 집은 아늑한 실내 분위기가 장점이었지만 4층 도로가에 위치하여 창문을 열면 지상으로 다니는 전철이 보였고 늦은 밤에는 조용한 도로 위를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흠칫 잠이 깨고는 했다.

그에 반해 이사한 집은 10층에 해가 잘 들고 늦은 밤 소음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 큰 방에는 중국어를 못 하는 한국 친구와 한국어를 잘하는 프랑스 친구가 2층 침대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프랑스 친구는 지금은 대만에서도 꽤 유명한 유튜버이자 방송인인데 덕분에 나도 한국과 대만 방송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다행히 이 곳에서는 3개월 넘게 살았다. 그렇다고 오래 살았냐고? 또 그것도 아니다. 이 곳에서는 3개월보다 2개월 긴 5개월 살았다. 그 사이에 중국어를 못 하는 한국인은 귀국을 했고 한국어를 잘하는 프랑스 친구는 점점 유명해지고 여자 친구도 생겨서 개인적인 공간을 찾아 떠나버렸다. 때 마침 그 집도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고 재계약 이야기가 나오던 시점에서 (지난번과 동일한 형태로 정리를 하는 쪽으로) 재계약을 포기하게 되었다.

여건이 되면 내가 인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오슝에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타이베이에 하나 더 운영하다가 큰 수익도 안 나면 나 스스로 지칠 것 같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는 그렇게 또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사를 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감정도 안 들었다. 그냥 이것이 해외에서 살아가는 자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포장이 끝난 후에는 이사를 도와줄 트럭 차량을 불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회사 기숙사로 짐을 날랐다.

[셰어 하우스 방 1개 기준 이전과 동일하게 60만 원. 건조기 포함]



아홉 번째. 회사 기숙사로 입주하게 된 사연은?

현재 근무 중인 대만 외식 기업이 올해 초 사옥을 옮기면서 본사 사무실 위에 2개 층을 직원들 휴게실과 기숙사로 변경하면서 입주할 생각 없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땐 회사 기숙사에 대한 이미지가 합숙소 같은 느낌이 들어가기 싫었는데 이사를 하면 매달 월 40만 원 정도를 절감할 수 있었고 이곳은 회사를 다니는 한 이사할 일은 없을 거 같아서 고민 끝에 입주를 하기로 했다.

회사는 정확히 타이베이(臺北)가 아닌 신베이(新北)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고 타이베이랑 먼 거리는 아니었다. 타이베이역에서 공항 철도를 타면 7분 만에 도착을 하는 사실상 행정 구역으로만 구분이 될 뿐 거리상 큰 차이는 없었다.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이 되어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크고 작은 회사들과 물류 창고 공장들 (중간에 가구 거리까지) 이 몰려 있었는데 이 곳은 '신베이 산업단지'라고 불리는 곳에 내가 다니는 회사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녁만 되면 다 퇴근하고 암흑이 되어 버리는 거리가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여러 차례 이사하면서 느낀 점이 또 하나 있다면

"마음에 들면 드는 대로 안 들면 안 드는 대로 그렇게 적응하고 살아지더라"라는 것이다. 

 

이곳은 베트남, 태국 등 주로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다. 심지어 어떤 식당은 다 태국어로 되어 있어서 들어갔다가 당황한 적도 있었다. 사실 이곳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벅스나 맥도널드가 없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모스 버거가 있고 커피는 곳곳에 있는 편의점에서도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크지는 않지만 지하철 역 근처에 영화관도 있어서 최근에는 한국 재난 영화 'EXIT'를 보고 왔고 다음 달에는 대만에서도 개봉하는 '1982년 김지영'도 보러 갈 생각이다.

 

기숙사에 입주한지도 1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이 동네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들을 보면서 괜한 자부심도 느껴본다. 이 동네에 사는 한국인은 나밖에 없을걸? 하는 그런?

한편으로는 나는 가끔 이곳에 사는 동남아 친구들이 부럽다. 그들은 처음에 집값을 아끼기 위해서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힘들 때 의지해 주고 도와주고 안아주는 모습이 너무 부럽더라.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안아줄 수 있고 술 한잔 먹고 싶을 때 바로 나와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살기 싫었던 동네였지만 적응을 하니 정이 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떠나기 싫은 동네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이 동네에도 대만 체인점 슈퍼마켓 하나랑 밤늦게(대부분 7시까지 영업)까지 하는 카페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열 번째. 어디로 갈지 몰라서 기대되는 열 번째 이사를 앞두고.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릴 때쯤이면 대만에 온 지 정확히 5년이 될 듯하다. 그동안 이사는 정확하게 9번 했다.

9번의 이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사라진 녀석들(이사를 끝내고 보면 희한하게 뭐가 하나씩 없다)도 있고 

대만 처음 왔을 때 한국에서 해외 이사를 통해 받은 밥통은 전압이 달라서 (한국은 220v, 대만은 110v) 급하게 집 근처 전자제품 가게에서 제일 싸 보이는 녀석을 구매했는데 지금도 잘 쓰고 있고 헤어 드라이는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입구 부분이 부러졌지만 성능에는 여전히 문제가 없다. 이사가 잦다 보니 짐을 줄이려고 정리를 해 놓으면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녀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이 나를 못 떠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가오슝에서 타이베이로 이사를 하면서 말도 못 할 정도로 나를 힘들게 했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처럼 보일까 봐 이번에는 담지 않았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10번째 이사를 준비 중이다. 이사 시기는 현재 근무 중인 대만 외식 기업과의 계약 만료일에 맞춰서 진행이 될 것 같고 새로운 도전을 앞둔 현재.

적당한 가격의 작은 주방 시설이 갖춰진 곳이면 만족할 듯하다. 아마도, 내가 무슨 일을 어디서 하게 될지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결정이 될 일이다. 그리고 10번째 이사는 대만에서 하는 마지막 이사가 되길 바라본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편함은 있어도 거부감은 없다.


'오히려 사각형으로 된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한정된 공간에서 혼자 놓여 있던 시간이 편했을지는 모르나 그건 자유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9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대만이라는 나라의 수도 타이베이와 제2의 도시 가오슝 그리고 타이베이를 받치고 있는 타이베이보다 더 큰 도시 신베이 등 3개 도시에서 생활을 해 봤다. 타이베이의 경우는 제일 번화가에서 타이베이의 바쁜 하루를 경험했고 신베이 기숙사 생활은 타이베이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작은 대만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3년을 생활한 가오슝은 그냥 내 삶의 일부였다.


대만에 계속 살게 된다면 어디가 제일 좋아?라고 묻는데 사실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주변 환경 개인 취향까지 동선까지 고려를 하면 가오슝 근처에 있는 도시와 시골 사이에 느낌이 나는 타이난이 좋지 않을까 싶다. 지하철은 없지만 버스가 기차가 있고 거리의 음식들은 너무 비싸지도 않고 맛과 정은 넘친다.

도시라고 하기엔 작고 시골이라고 하기엔 나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어서 나 같은 현대인이 살기에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사람 냄새나는 그런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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