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완짹슨 May 10. 2020

나는 '대만 야시장에서 회오리 감자를 팔았다' 마지막편

생애 첫 창업 이야기, 못다 한 이야기들.

나는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男과 女를 나누는 것도, 학교 이름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도, 출신 국가 혹은 대륙 별로로 나누는 것과 얼굴색으로 나누는 것은 특히나 싫음을 떠나서 혐오한다.


그리고 글도 나누는 것을 싫어해서 가능하면 한 편에 다 담으려고 하는 편인데 이번에 쓴 '생애 첫 창업 이야기'는 도저히 한편에 담을 수가 없었다. 결국 2편을 훌쩍 넘어서 번외 편까지 쓰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업계에서 이름 좀 날리는 작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난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그걸 요약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내 이야기가 조금 길었더라도 이해를 해 주길 바란다. 나름 줄인다고 줄인 것이니 말이다. 


암튼 시작해 보자. - 못 다한 이야기들

3개월 임대료를 지급하고 7월부터 시작한 첫 창업은 9월까지였는데 결국 3개월만에 나는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되었다. 계속 하지 못 하게 된 이유는 야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며칠이 안 되어서 새로운 사업 제안(대만 외식 기업에서 일 할 기회)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첫 창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큰 창업과 동시에 좋은 근무 조건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래서 9월에는 중간중간 자리를 비우는 일도 많았고 시간으로만 보면 반년도 아닌 고작 3개월이었지만 내 삶에서 그때의 3개월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3년 같이 느껴진다. 1년 중 제일 더웠던 시기에 한국에서 공수해 온 동계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땀을 흘리며 감자를 튀기고 또 대만 기상 역사에 남을 태풍 덕분에 살림살이가 다 날아가고 튀김기에 가득 찬 물을 빼내고 마지막에는 믿었던 아르바이트생의 배신(이것도 이야기가 길지만 생략)으로 그 이후로 나는 직접 자전거를 타고 감자를 사러 새벽 시장에 갔었다. 한BOX에 10KG하는 감자를 5KG씩 양 쪽 손잡이에 나눠 매달고 가는데 폭우를 만나 감자가 다 젖어버린 이야기 등, 나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에 지나갔다.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라고 했던 일들은 나를 더욱 성장시켜 주었고 좋은 일들은 나를 기쁘게 만들었으니까. 비록 돈 버는 재미를 느껴본 날은 몇 번 안 되었지만 더 중요한 건 회오리 감자를 팔면서 만날 수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감사함을 넘어 아직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순 없으니 간략하게 추려 보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손님들

수많은 손님들이 나의 매대 앞을 지나쳤고 적지 않은 손님들이 내가 튀겨 낸 회오리 감자를 맛보았다. 모든 손님을 다 기억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잊히지 않는 손님들이 있다.

하루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성 손님이 워아이니(중국어로 '사랑해'라는 뜻)의 한국어는 뭐예요?라고 질문을 하길래 나는 무의식 중에 '사랑해'라고 말을 했는데 그 여성 손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방금 내가 했던 말 '사랑해'라고 말하고 그대로 멀리 튀어? 버렸다. 사실 사진도 없고 정신이 없을 때라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그 순간은 기억이 또렷하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귀여운 기린 인형이 놓여 있었다. ^^ 

아무래도 어린 친구들이 기억에 남는 편이다.

귀여운 고백을 하고 튀어버린? 손님도 기억에 많이 남지만 이 외에도 가끔 다른 구역에서 장사를 하는 사장님들의 자녀들이 기억에 남는다. 부모님들이 바쁘게 일 하느라 심심하면 나에게 놀러 오거나 회오리 감자를 사 먹으러 왔었는데 어린아이들이 내게 60원을 주면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고 하면서 10원을 다시 쥐어 주었다. 그 이후로 그 아이들은 1주일에 한 번은 꼭 나를 찾아왔고 나는 여전히 용돈 하라며 10원씩 돌려주었다. 한 손에 내가 준 동전을 쥐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10원의 행복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야시장의 아이들이 기억이 많이 남는다. 간혹 혼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2 ~ 3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가끔 일찍 와서 장사를 준비하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장난감 하나를 넣어주고 장사를 준비하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 곳이 그들에게는 진정 삶의 터전이구나 싶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장사를 재미로 혹은 한 순간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생존의 수단인데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그들의 자리를 하나 뺏은 것밖에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고정하지 못 한 매대가 부러져서 안경이 깨지기도 했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지난 일이 되어 과거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야시장은 낮. 왼쪽에는 부모님을 돕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회오리 감자 하나로 '대만 그리고 장사와 인생' 이 3가지를 배웠다

나는 회오리 감자 하나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돈 많이 벌었어?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이전 이야기를 봤다면 알겠지만 돈은 뭐 거의 벌지 못 했다. 누군가가 그것이 성공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는 기준의 한 요소라고 한다면 나는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5년이 넘는 대만 생활중에서 조금 더 넓게는 내 인생에서 그 시간을 빼놓고는 도저히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가 없기에 그리고 그때의 도전과 선택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만들었기에 그때의 도전은 분명히 성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간혹 야시장에서 다시 일하는 꿈을 꾸고는 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렀고 부족했지만 이제는 자신감도 넘치고 더 좋은 나만의 아이템!(말할 수 없는 비밀)까지 준비가 되었다. 지금도 충분히 대박낼거 같은 기분이 들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일은 말이다.

이제는 그때의 기억을 추억할 수 있는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대만 야시장에서 회오리 감자를 팔았다' 이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