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첫날 이야기부터 태풍으로 전재산까지 날아갈 뻔한 이야기까지.
한마디로 무진장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말이다. 어제까지 이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손님 중에 한 명이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손님들을 끌여당겨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하는 사장님이 된 것이다.
나와 불과 몇 걸음 앞으로 지나가는 손님들이 보였지만 나의 작은 목소리는 낯가림이 심한 어린아이의 속삭임과도 같아서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 했다. 나는 이 곳에서 장사를 하게 되면 춤이라도 추면서 손님들의 이목을 끌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막상 장사 첫날 나는 서 있는 것부터 모든 것이 영 어색했다. 도통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 와중에도 간간히 찾아주는 손님들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나를 '라오빤(老闆 : 중국어로 사장님이라는 뜻)'이라고 불러 주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처음 듣는 사장님 소리에 나는 동물원 안에서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호랑이처럼 내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전 사장님이 고용했던 대만인 아르바이트생이 계속 출근을 해 주었고 그는 나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내 몫까지 열심히 소리쳐 주었다. 나보다 중국어가 유창한 것은 물론이다.
때마침 장사 첫날은 금요일이었다. 어딘들 다 그렇지만 야시장이 제일 붐비는 날이었다. 어느 순간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손님이 많아서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아직 능숙하게 접객을 못 한다는 생각에 사장님으로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긴장감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긴장을 하니 중국어도 안 들리기 시작한다. 사실 이때는 중국어 초급을 막 벗어나던 시기였기에 야시장에서 일하면 중국어도 많이 늘 거야!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장사 첫날 손님들이 주는 지폐를 접을 겨를도 없이 주머니에 쑤셔 넣고 회오리 감자 나무 꼬챙이의 끝을 휴지로 돌돌 말아서 조심히 드리는 것만으로도 땀이 뻘뻘 흘렀다. 어느 순간에는 계산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주는 대로 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하다 보니 나를 긴장시켰던 줄도 사라졌다. 오, 이제 한숨 돌렸다.
뒤늦게 목마름을 느꼈지만 물을 실컷 마시지는 못 했다. 이는 야시장에서 일하는 내내 그랬는데 물을 많이 마시면 아무래도 화장실을 가야 했고 주말에는 어마 어마한 인파를 뚫고 다녀오는 시간이 어림 잡아도 10분이었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나의 매대 앞을 지나가는 손님들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면 불안한 것(잔돈 통도 심히 마음에 걸림)이 사장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 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직원일 때 몰랐던 것들을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를 위한 준비가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기존 장비들을 인수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작은 어찌어찌할 수 있었지만 변화는 분명히 필요했다. 특히 대만 친구가 찍어 준 사진을 본 후에야 복장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일할 때 입을 옷과 퍼포먼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금요일 그리고 일요일까지 정신없이 일하고 정신없이 팔았다. 출근하면 매일매일 새로운 얼음(냉장고가 없어서 아이스 박스를 사용)을 채우고 부족한 감자를 새벽 시장에서 사 오고 새 기름을 받아서 교환하고 폐유는 매주 업체 분들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재판매?를 했다. 그렇게 첫 주가 마무리되었다. 계산을 해 보니 1일 평균 매출이 3,000元 (한화로 약 12만원) 정도였다. 엄청 많이 팔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를 판 것이다. 그리고 대게는 그 정도 수준을 유지했었다.
잠시, 원가 계산을 해 보자
당시 개당 판매 가격은 대만 돈으로 60元, (당시 환율로 2,300원 정도) 50개를 팔았다고 했을 때 일 매출이 한화로 약 115,000원. 여기서 임대료 1일 기준 약 35,000원을 제하고, 그리고 첫 주에는 혼자서 버거울 것 같아서 아르바이트생을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6시간이나 고용해서 당시 최저 시급으로도 약 35,000원이 지출되었다. (이제 여기서 재료값을 제외하면, 하... 적자의 흔적이 느껴진다.)
고정비를 제외하니 남은 금액은 45,000원. 여기서 다시 원재료값 (주 원재료값은 감자인데 간혹 썩은 감자도 들어 있어서 LOSS 발생. 그리고 기름, LPG 가스, 반죽 재료까지) 약 38,000원을 제외하고 대략 7,000원 정도가 내 호주머니로 들어온 셈이다.
알바보다 먼저와서 준비하고, 본격적인 영업시간인 6시부터 밤 12시까지 물 한잔 제대로 못 먹고 배고픈지도 모르고 열심히 팔고 설거지 끝나면 새벽 1시. 집에 오니까 새벽 2시. 그렇게 일하고 돈 번이 한국의 1시간 시급 수준이었다. 내가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은 나보다 적게 일 했는데 나보다 많이 벌어갔다. (물론 그 입장에서는 최저 시급만 받았지만 말이다)
겨우 첫 주차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힘들기는 해도 하고 싶어 했으니까 후회는 없었지만 소위 말하는 '돈 버는 재미' 가 없었다. 핑계과 원인 사이에서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1.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회오리 감자의 존재
사실 야시장 내에서 감자를 원료로 해서 판매하는 음식은 꽤나 많다. 흔히 볼 수 있는 감자튀김은 물론 대만을 다녀간 여행객들이라면 다들 알만한 치즈 통감자부터 감자를 갈아서 그것을 파전처럼 음식까지 꽤나 다양했다. 하지만 당시에 회오리 감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음식이었다. 이 전 주인도 타이난에서 1년 반 동안 판매를 했지만 매출이 오른 것은 실제로 6개월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리고 가끔 손님들이 감자 껍질도 같이 튀기는 거냐? 라고 묻고는 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감자 음식을 먹을 땐 껍질은 늘 벗겨 먹고는 했는데 여기서는 껍질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장사는 하루만 보고 해서는 안 되며 길게 봐야 한다고 말 하면서도 막상 하루에 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을 손에 쥐게 되니 초조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2. 대만의 우기(태풍) & 무더위 시작
예전에 창업을 할 때 시기(트렌드 등등)가 참 중요하다고 했는데 야시장의 경우는 시기보다는 계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 같은 경우는 안 그래도 더운 나라에서 제일 덥고 습했던 7월부터 장사를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3개월 동안 무려 3번의 태풍을 맞이 했는데 한 번은 내상이 아주 심각했다.
태풍이 왔을 때 영업을 못 한 것(임대료는 이미 완납)은 물론 대만의 태풍을 우습게 알았던 나는 비닐 호루만 슬쩍 덮고 평소처럼 잡아당기면 바로 풀릴 수 있도록 끈을 묶고 집에 갔다가 아주 큰 코를 다쳤다. 튀김기에는 기름 대신 빗물이 가득했고 비싼 조명은 다 깨져 버렸다. 일부 물건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해서 주워 오기도 했고 끝내 못 찾은 녀석? 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 대만에서 수차례 태풍을 경험한 주변상인들은 자물쇠까지 가져와서 꽁꽁 싸 맨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다. 나는 그들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태풍과 무더위 우기가 반복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는 대만에서는 비수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습하고 더운 날씨에 나는 'HOT한 음식'을 팔고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악재라면 악재였다. 당시 가오슝은 타이베이 스린 야시장처럼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결국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반등해야만 했다. 좀 더 길게 봐야 했다.
3. 길거리 음식에도 高퀄리티가 있다.
이것은 내가 아닌 나의 새로운 후임자? 분의 전략이었는데 새벽 시장에서 나보다 더 꼼꼼하게 감자 하나하나를 고르고(회오리 감자에 적합한) 그렇게 가져온 감자는 빡빡 닦아서 손님들이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내가 봐도 반들반들한 껍질의 감자는 내가 봐도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후임자 분은 (겨울 성수기 + 이 전 사장님들이 깔아 놓은 메뉴 인지도까지 더해져 1일 평균 판매량이 150개 ~ 200개로 올라왔다.
내가 평균 판매량 50개를 밑돌 때 내가 놓친 문제점을 개선하여 나의 판매량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결과적으로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장이었던 셈이다.
작은 규모에서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나의 인건비는 건지고 싶었다. 그래서 야시장의 장점 '사장 마음대로'를 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엉뚱할지라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로 했는데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대만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이미 종영 뒤) 태양의 후예(당시 지하철을 타면 양 옆으로 대만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태양의 후예를 보고 있을 정도)를 좀 우려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는 동생에게 새로운 메뉴판 시안을 부탁하고 한국에서 황토 색깔의 군복 주문을 그리고 전역한 분에게 부탁해서 검은 베레모를 공수했다.
그리고, 메뉴판 끝에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서 사장님이 한국 사람(생김새가 비슷해서 말 안 하면 잘 모름) 임을 적극 알리기로 했다.
효과가 있었을까? 사실 눈에 확 띌 정도로 매출이 오르지는 않았다. 내가 장사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1일 100개를 넘겨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유와 문제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회오리 감자를 먹기에는 여전히 덥고 습한 날씨가 컸다. 그래도 손님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훗 날 대만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국인이라서 좋았던 이유'를 주제로 태양의 후예 군복 입고 회오리 감자를 팔았던 이야기를 했었다.
韓國 歐巴 (한국 오빠)라는 뜻이다. <풀 영상이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까 봐 아래 링크를 남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RU_0tdRvkaA&feature=youtu.be (23분 이후부터)
비밀을 하나 공개하자면 장사할 때 너무 더운 나머지 군복을 상의만 입고 하의는 그냥 반바지(영상에서는 절대 안 보임)를 입고 손님들을 접객했다는 사실. 정말 미친 듯이 더운 여름 튀김기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흐르던 그 시절 입에서는 단내가 나도록 외치고 화장실 한번 갈 여유도 없었지만 손님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반바지라도 없었더라면 나는 제 풀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중국어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돈은 많이 벌지 못 했지만 내게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나는 성장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괜찮았다고 그냥 좋았다고 말이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야시장 최고의 단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비 오는 날이다. 더우면 더워서 지치지만 사실 이것은 그럭저럭 괜찮다. 문제는 '비가 오는 날'이다. 임대료는 이미 3개월치를 납부했는데 비가 와서 장사를 못 하니(하더라도 손님이 없다) 그 속상함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은 크게 3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영업 중에 비가 오는 것이랑 작은 비와 큰 비로 나뉜다. 여기서 제일 힘들 때는 영업 중에 비가 오는 것이다. 오늘도 열심히 손님 맞을 준비를 다 해 놓고 열심히 반죽까지 다 만들고 기름도 채웠는데 비가 와서 손님이 끊기면 그 반죽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준비는 했으니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공용 설거지장은 야시장에서 떨어진 주차장 한편에 마련되어 있어서 설거지 거리를 담고 먼 거리를 우산을 들 손이 없이 오고 가야만 했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은 결국 펼쳐 보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다. 차라리 이런 경우는 속이 편하다. 야시장이 월, 수가 고정 휴무일이기 때문에 화요일에 비가 크게 내려주면 그냥 마음 편하게(반대로 주말에 큰 비 오면 아주 속 쓰림) 쉬면 되는데 문제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다. 나가서 몇 개라도 팔아야 인건비는 고사하고 임대료라도 벌 텐데라는 생각과 어차피 몇 개 팔지도 못 할 텐데 또 쉴까?라는 두 가지 의견이 나의 마음속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에도 많지는 않지만 손님들은 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은 평소보다 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굳이 들기 불편해 보이는 길고 긴 회오리 감자를 선호하지는 않은 듯하다. 게다가 회오리 감자는 식사보다는 간식에 가깝기 때문에 비 오는 날에도 야시장을 찾아올 열성 손님이라면 아마도 찾은 음식이 이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 운이 좋아서 8개라도 팔았던 적이 있다. 비록 인건비는커녕 1일 임대료도 안 나오지만 비 오는 날에 야시장에서 일하는 것은 또 그것만의 재미와 감성이 있다. 비가 오면 정리를 하는 것도 힘들고 집에 가는 길도 힘들지만 비가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니 그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주변 상인들과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서로 파는 음식들을 나눠먹기도 하고 옆집과 잠시 수다를 떨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스통 이거 안으로 조금 이동해 주시겠어요?" 옆집 사장님의 첫마디였다. (나의 가스통이 선을 살짝 물고 있었는데 안으로 넣어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장사를 시작하고 3일 정도가 지나서야 장사를 시작하셨던 사장님은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할 말은 다 하셔서 나도 살짝 마음이 상했지만 나는 외국인이었고 매일 밤? 봐야 하는 사이에 굳이 얼굴 붉힐 일이 없었기에 웃으면서 가스통을 안으로 옮겼다.
나나 아저씨나 이 곳에서는 야시장 신참이었다. 첫인사는 그렇게 시작 되었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는 꽤나 가깝게 지내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나는 중국어 연습도 할 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저씨는 외국인이 야시장에서 회오리 감자를 파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셨는지 틈만 나면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셨다. 아저씨는 평일 아침에는 상하차 일을 하고 저녁에는 야시장에서 홍차와 밀크티를 파셨다. 사실상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사장님을 보면서 가장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대만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옆집 아저씨의 아들은 야시장에 땅거미가 깔릴 무렵 대만식 도시락을 금세 먹어 치운 후 익숙하게 아빠를 돕기 시작한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어쩌면 아빠의 일을 돕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만은 그런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국가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나의 생각은 그들에게 실례인 듯하다. 나는 그저 그런 아이가 대견스러워 가끔 회오리 감자를 먹기 좋게 잘라 주기도 한다. 방금 도시락을 다 먹었는데도 끊임없이 먹는 걸 보니 어릴 적 내가 생각이 나고는 한다. 내가 기억하는 대만의 야시장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