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에 대하여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유독 흥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 좋아하세요?"라는 이 한마디에 눈빛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목소리는 하이톤(High - tone)으로 바뀐다. 어느새 여행자는 잠시 잊고 지내던 여행 속 에피소드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같이 웃고 떠들기도 하고 때로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어느새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 이야기 한번 해 주세요"라는 한마디에 시작된 여행 이야기는 무려 한 시간을 쉼 없이 이어졌으나 지루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오히려 드라마 한 편을 다 보고 다음 편을 궁금해하는 어르신들 같았다. 여행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재미를 느꼈는지 이내 범위를 넓혀서 공간을 대여해서 여행 사진전을 개최하고 더 나아가 모르는 온라인에서 일면식 없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여행을 주제로 한 크고 작은 강연과 모임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담은 책을 출판 계획까지 하였으나 현재는 미뤄둔 채 잠시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위에 언급한 이야기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필자의 이야기다. 첫 여행을 귀국길에 면세품을 그대로 기내에 들고 탑승하려고 했다가 비싼 화장품을 다 버릴 뻔했던 여행 초보가 이제는 가방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여행 예찬론자가 되어 버렸다.
"일단, 떠나 봐. 떠날 수 있을 때"
가끔 여행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앵무새처럼 말하고는 한다.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추기면서? 말이다.
하루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냐고 말이다. "아니, 무엇이 너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냐?"라고 말이다. 하나 내 답변은 앞서 것처럼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떠날 용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뿐이라고" 이제는 불혹에 접어들면서 장거리 이동이 조금 버거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여행을 하는 순간순간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듦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는 격투기 선수들이 집중해서 싸울 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다가 '경기가 끝난 후 뒤늦게 통증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호흡 하나에 결과가 갈리는 양궁 같은 여행도, 축구처럼 팀을 이뤄 쉼 없이 움직이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여행은 종합 격투기나 철인 3종 경기에 가까운 편일 것이다. 양궁처럼 멈춰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축구처럼 단체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이 어딘가 이것저것 섞였지만 각각의 색이 반짝거리는 그런 여행. 경기 중에는 온전히 몰입해 아드레날린이 붐비 되어서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여행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 이면에는 사람이 있었다. 여행 중에 끊임없이 마주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고 그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여행을 진정 빛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 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 때문에 여행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에서였다. 첫 여행지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는 별반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색을 띠는 감정의 즐거움은 화려한 풍경도 거대한 쇼핑몰에 가득 채워진 명품도 아닌 그저 사람이라는 향기로부터 불어오는 것이었다. 다른 피부색과 전혀 다른 신념의 종교를 가졌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람들보다 히잡을 쓴 여성과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고물에 가까운 오토바이를 타고 타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 그러나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건네는 그 웃음과 인사는 내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다.
마치 마라톤 중간중간에 물을 건네어주는 급수대 봉사를 자처한 사람들처럼, 내가 여행 중에 동력이 떨어져 지치려고 하면 기적처럼 누군가 나타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그때의 경험들이 여행 중에 믿음이 생겨난 계기인 듯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들이 내민 손을 거절하기 않았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내민 손을 거절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행은 지속은 되겠지만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빠진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 이후로는 오히려 현대화된 곳에서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들 나와 접점이 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을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 중에 빈민가가 보이면 꼭 들리는 편이다. 빈민가에 산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까지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환대 면에서는 넥타이를 매고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보다 적극적이다. 언제부턴가 내 여행은 어디를 다녀온 사실보다, 누구와 마주 하고 왔는지가 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적과 성별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나는 어디로 떠나더라도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