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완짹슨 Dec 29. 2020

'대만에서' - 쉐어 하우스 운영 후기 ('헤어짐'편)

헤어짐은 곧, 새로운 만남의 알림이다

2017년 여름. '헤어짐을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

쉐어 하우스 운영도 이제는 지나버린 이야기가 된 것처럼 그 속에서 만난 인연들과도 헤어질 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디디는 더 큰 도전을 위해서 타이베이로 이직을 선택했고, 인도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제이는 군입대를 위해 귀국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각자 다른 이유 속 같은 생각으로 모이게 되었지만, 7개월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후 이제는 다른 이유들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현재 남은 것은 그때의 기억들뿐이며 이 글은 그 기억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평생 남이라는 존재로 모르고 지냈어도 혹은 알고는 지냈어도 딱 그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고 살았을지도 몰랐을 관계가 쉐어 하우스라는 공간을 통해서 그 앎의 깊이가 달라졌다. 그 사이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타지에서 맞이하는 생일날에 선물을 준비해 준 것도 그들이었고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하여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남은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 주며 혼자 먹는 나를 지켜봐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관계 속에서 생기는 작은 단점이 있다면 그 끝이 보이면서이다.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하기도 하고 시원 섭섭한 마음이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한다고 할까? 특히나 쉐어 하우스 입주 1세대들의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정을 너무 많이 준 탓이다.


그러나 이곳은 잠시 스치듯 머무는 곳이고 그로 시작된 인연의 향기를 남기고 가는 곳이지. 영원히 함께 할 순 없는 곳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작별을 고할 때 아쉬움은 그들이 남기고 간 향기만큼이나 진하게 남아서 나를 며칠 동안 앓게 만들었다.

<셰어 하우스 1세대 멤버인 '디디와 제이' 그리고 고양이 이름은 '망고와 감자'이다>


헤어짐은 곧, 새로운 만남의 시작. 


새로운 입주자 모집. 걱정 반 설렘 반 속에서

하지만 헤어짐에 익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입주자를 찾아야만 했다. 입주자를 찾지 못하면 결국 모든 금전적인 손해는 내가 감수해야 하니 말이다.



1세대가 떠난 후 바뀐 것들

- 혼자가 아닌 순간부터 공동체 공간에는 생각보다 많은 약속들이 필요하다. -

2017년 여름 무렵. 첫 입주자들이 떠나는 날짜가 정해지면서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위치는 가오슝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고 집 내부도 처음보다는 가성비 좋은 가구들로 채워 나가면서 나름 집 같은 구색을 갖추어서 이쁘게 광고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월세를 높게 잡을 수는 없었다. 쉐어 하우스를 들어오는 경우는 1세대들처럼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대부분은 비용 절감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좀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큰 변화를 준 것은 월세에 각종 공과금을 포함해서 받기로 한 것이다. 즉 월세만 내면 다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증금을 한화 약 10만 원 정도로 확 낮춰버렸다.

(이건 입주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장점이기도 했지만 사실 보증금을 돌려줄 때 뭔가 내 돈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싫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더! 한국인과 살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합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만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느 대만 친구 혹은 외국인 친구가 부산에서 자기와 함께 살 한국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 이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혹 먹힐 때가 있었다.


결론 :

1. 단기 거주 가능 (최소 1개월부터)

2. 월세에 각종 공과금(전기, 물, 생수, 인터넷 등) 포함

3. 두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살 수 있다는 점

4. 마지막으로 한국인과 같이 살 수 있다는 점?

- 이런 것들이 '나름의 차별화'가 되었다 -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새롭게 바뀐 내용들이 괜찮았는지 꽤 많은 문의가 있었다. 그렇지만 문의보다는 계약이 중요했다.  

결국 회사가 도보로 5분이라고 관심을 보였던 대만 친구 '보위'가 입주를 확정 지었다. 그 친구는 가오슝에서 기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타이난이 고향인 친구였는데 특히나 고양이도 좋아해서 우리 집에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또 들어온 친구(이름 까먹음)는 가오슝 사람이었지만 집이 워낙 외곽에 위치해서 중심가에 살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보위와 다르게 4번(한국인과 같이 살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오래 거주하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운 멤버들이 입주한 이후 기념 식사는 lalala house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왼쪽은 '아빠와 아들'인데 자세한 사연은 뒤에서 다시 다 둘 예정이다. 그리고 가운데 남자가 '보위' 그 옆으로 이름은 까먹어버린 가오슝 친구와 그녀의 한국 친구(그냥 놀러 옴)이다.


그렇게 헤어짐 후에 새로운 만남이 찾아왔지만, 이들과도 언젠가는 또다시 헤어짐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게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이전보다는 조금은 노력하게 될 것이다. 정을 덜 주는 노력 말이다.



P.S 통일된 언어가 없었던 우리들의 대화

디디와 제이 그리고 내가 함께 살 때이다. 디디는 내가 본 대만 사람 중에서 영어를 제일 유창하게 구사했고 제이 또한 인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기에 웬만한 영어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런 반면 나는 영어의 경우는 둘 사이에 낄 정도의 고급 수준은 아니었다. 반면에 나는 중국어가 가능했기에 디디와는 중국어로 대화를 했는데 그럴 땐 중국어를 못하는 제이가 대화에 끼지를 못 했다. 그럼 디디는 영어를 사용해야만 했고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멀뚱멀뚱' 둘을 바라만 보게 되었다. 


게다가 나와 제이가 대화를 할 때는 한국어를 못 하는 디디(지금은 중급 정도의 수준으로 향상됨)가 '멀뚱멀뚱' 하는 상황. 한마디로 세명이 함께 다니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가 날아다니는 대화가 오고 갔다. 

물론 제이가 어학당을 다니면서 막판에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기는 했지만 그 시간을 즐기기에는 함께 한 너무 짧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