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설명하는 언어
내 친구는 제법 요리를 할 줄 아는 남자이다. 요. 알. 못인 내가 은근히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도 자랑삼아 말하고 다닌다.
“그래 너는 얼굴이 안되면 그거라도 잘해야지”
하며 매번 친구를 놀리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늘 녀석의 요리 실력이 부럽기도 하고 탐나기도 한다. 특히 친구가 한 요리 사진이 SNS에 올라오고 게시물에 자상한 남편, 요섹남 등의 댓글이 달리면, 왠지 모를 질투심이 샘솟고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당구를 치고 있는데, 친구의 와이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당구에 집중하는 친구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는 바람에, 나도 고스란히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대략적인 상황은 친구의 와이프가 친구에게 어떤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친구가 와이프에게 이런저런 식재료를 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요리를 잘하면 간도 크지. 감히 와이프한테 저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또 한 번 부러움이 몰려온다. 뭐라도 트집을 잡아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 녀석이 말하는 것이 영 거시기하게 들려온다. 내가 친구 와이프라면 짜증이 폭발할 것 같다.
“응 여보. 일단 냉장고에 배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아 맞다. 우유도 없을 거야.. 파도 없고…아 보자. 그러고 보니 양파하고 레몬도 좀.. 버터도 없을 거야. 치즈도 있음 더 좋고…”
와이프와의 통화를 끝내고 왠지 모르게 더 자신감이 승천한 친구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본다.
“야. 와이프 막 부려먹네. 근데 시킬 때 정리 좀 해서 시키지 그러냐”
“정리? 뭘 어떻게 정리해? 듣는 사람이 알아서 듣는 거지?”
“그렇지 내가 너처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먹고 산다.”
“네가 말하는 방식이 전형적인 나열식 말하기야. 나는 그것보다 좀 더 구조화된 말하기 방식이 설명이나 설득에 유리하다고 생각해. 한번 봐봐.
네가 말한 방식
배, 우유, 파, 양파, 레몬, 버터, 치즈
내가 추천하는 방식
야채: 파, 양파
과일: 레몬, 배
유제품: 치즈, 버터
뭔 차이가 있냐 싶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바로 구조화된 말하기 방식이다. 정보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통된 속성끼리 묶어서 정리를 해주고, 큰 그림부터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말하기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듯이 말하는 방식이다. 만약 내가 친구였다면 아마 와이프에게 이렇게 요청했을 것이다.
"여보~ 일단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야채, 과일, 유제품류가 필요해. 먼저 야채는…”
구조화된 말하기 방식이 설명에 유리하고 상대방이 이해하기 쉬운 이유는 우리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한 마디로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Room(방)을 만들어 주고 이야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말할 내용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고, 그 그림 안에 정보를 집어넣어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정리도 잘되고 이해도 빠르다. 이것이 바로 그림 그리듯이 말하는 것의 핵심이다.
아직 잘 이해가 안된다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한 가지 예를 더 들어준다.
“야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자기소개를 해볼게”
“무슨 갑툭튀 자기소개야?”
“일단 들어봐 봐.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내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할 거야. 어때?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아마 니 머릿속에 장점이라는 방과 단점이라는 방이 생겼을걸? 그러고 나서 내가 장점은요.. 하고 이야기하면 니 머릿속에 만들어진 장점이라는 Room(방) 안에 내가 말하는 정보들이 쌓이는 거야. 정리도 쉽고 이해도 빠르지. 안 그러냐?”
비로소 친구가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파고들어 본다.
“내가 한 가지 더 팁 알려줘? 말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얘기할 때 그 가지 수를 알려줘. 예를 들면,
제가 3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제품의 특성은 4가지입니다.
등으로 말하는 거야. 이것도 비슷한 원리인데, 3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린다는 말을 들으면 내 머릿속에 3개의 방을 만들고 대기하는 거지. 혹시 너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했던 연설 생각나냐? 그때 첫마디가 뭐였는지 알아?
That’s it. Just 3 stories…….
“아 맞네. 제가 오늘 여러분들께 드릴 말씀은 3가지 입니다로 시작했지. 진짜 신기하네. 잡스형은 역시 말하기의 달인이었군.”
요알못 친구에 대한 나의 소심한 복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개그콘서트가 방영 중인데, 마침 ‘애매한 것을 정리해 주는 남자’가 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지인 결혼식 축의금으로 얼마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3만 원은 택시로 따지면 기본요금이고, 언제 5만 원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때 애정남, 최효종 씨가 구조화된 말하기 방식으로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비수기 : 5만 원
성수기 : 3만 원
아 역시 명쾌하다. 구조화된 말하기로 내 머릿속에 딱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만약 최효종 씨가 이렇게 말하지 않고, 1월에 5만 원, 2월에 5만 원, 3월에 3만 원, 4월에 3만 원……12월에 5만 원이라고 나열해서 말했으면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많은 것은 득인데,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독이다. 가끔 정리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해독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않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구조화된 방식으로 그림 그리듯이 말한다. 딱 내 머릿속 정보를 판화로 찍어서 똑같이 전달해 준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평소 말하기가 아니라 뭔가 설명하거나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고자 할 때, 구조화된 말하기 방식으로 말해보자. 설명의 달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친구 말 좀 할 줄 아네'라는 칭찬 한마디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