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끝
끝 (킨야쿠마리)
지쳐 쓰러져 울고 싶을 때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 도망치고 싶을 때
누군가와의 관계로 숨어 버리고 싶을 때
나는 정말 있을지 모를
끝이라는 곳으로 가보고 싶어 져
그곳으로 가면
그곳에선
어떤 것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만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미소를 지을 것만 같고
내가 너로 인해, 네가 나로 인해 행복해질 것만 같아서
진정 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그 끝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해
저녁도 먹고 잠도 잤건만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는 엄마의 품처럼 알 수 없는 안정감이 생겼고
보조 배낭을 베고 자세를 잡으니 덜컹이는 자장가에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절기상 겨울이지만 인도는 동남아랑은 다르게 낮엔 덥고 밤엔 쌀쌀함을 더 했다.
오래된 기차 창문의 이가 맞지 않아 덜컹거림과 실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한몫을 했을 테지
늘 그런 식 이여서 슬리핑 기차를 탈 때면 한기에 잠에서 깨어, 배낭에서 담요를 덮고 또다시 잠에 들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살짝 뜬 실눈 사이로 몇몇의 부지런을 떠는 인도인들이 앉아 등을 기댄 체 눈을 감고 있다.
AM 5:15분
짐이 잘 있는지 먼저 확인을 하고 신발을 신고, 옷맵시를 가다듬었다.
창문을 올리니 어둡던 기차 안에 밝음이 스며들고 어스름한 어두움 속에 멀리서 작은 미명이 보인다.
또 밤사이 내린 비로 멀리 산엔 구름인지 안개인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무언가 조용한 시골로 몹시 흥분과 설렘으로 기대가 된다.
기대가 높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서도. 마이솔과 마두라이. 마마 브라더스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이다.
태국의 치앙칸이나 라오스에 시판돈, 므앙만 같길. 아니 그 이하도 괜찮으니 적당히 조용하길.
충분히 안정되길.
종착역 킨야쿠마리.
간이역처럼 작은 것이 뭔지 모를 끌림이 있다.
릭샤들의 쉼 없는 랩을 뒤로하고 버스를 타려 했으나 충분히 작은 마을이라는 한마디와 조금만 걸어도 숙소들은 나올 것이라는 말씀.
정말로 가는 길에는 호텔들이 많았다. 가격들이 뭄바이 이상으로 비싼 게 흠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이작은 시골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외관들은 대도시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이나 인도에선 초초호화 호텔이 아니고선 거의 거기서 거기다.
조금만 덜 더러울 뿐.
몇 번의 룸을 확인하고선 적당한 가격에, 작은 테라스가 있고 그 테라스에서 인도 최남단의 바다가 보인다는 것.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이다.
한 가지 더 욕심이 있다면
맛있는 식당이 있다면 좋겠다는 것.
체크인과 동시에 가방들을 꽁꽁 와이어로 묶어두고
오래간만에 배낭 없이 가벼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동네 한 바퀴.
작은 시장을 지나니 사원 같은 것이 나오고 그 옆길 작은 터널을 지나니 바닷길이 나온다.
킨야쿠마리의 랜드마크 대형 동상이 나온다.
인도의 세잌스피어로 불리는 인물이라고. 늘 그렇듯. tv나 책에서 나오던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건 언제나 흥분이 된다.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두근두근 거린다는것.
이것만으로도 여행이라는 건 충분한 매력이 있다.
인도 남쪽의 최남단이라 섬 하나 없이 확 트인 바다 또한 청량감과 시원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작은 도시에 맞지 않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윗도리를 벗고 전통 치마바지만을 입고 물속에서 씻는 건지 물장구를 치는 건지 모르지만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하다.
지난 죄를 씻는가?
아니면 새해를 맞이할 복을 비는 건가? 알 수는 없다.
나도 죄가 많은 인간이라 한 번은 해볼 의향은 있으나 이방인의 물쑈가 모두의 집중이 되는 게 조금은 두려웠다.
해안을 낀 도시라 조개껍질을 파는 상인도 많고 길거리에 문신을 해주는 사람 등등
정말 사람이 많다.
1년 중 12월에만 인파가 넘친다는데
오늘은
12월이 되기 하루 전날이다.
조금 거닐다 느낀 건 그 만은 인원들이 전통의식만 치르러 온 것은 아닌 것만 같다.
분명.. 쇼핑을 하러 왔을 거야.
끝도 없이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진 잡화상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또 그 많은 인원이 옷을 구매하던 장면들.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 끝없던 길의 끝에 선셋 포인트가 있었으나 이른 아침에 떨어진 이곳. 체감시간은 PM 2시쯤 되었을 꺼라 생각했는데
고작 AM 9:30분이다. 작은 마을치곤 해변 산책길이 꽤 길다.
부지런히 걸어 충분히 깨끗해 보이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다.
남인도는 육식이 거의 없더라. 거의 전부가 채식. 아침이야 적당히 먹었지만.
벌써 점심 걱정이다. 먹고 지낼만한지 벌써 다음 걱정을 한다.
정신적 사치다.
세제를 하나를 사고 빨래를 했다.
볕이 너무 좋다.
보송보송 마를 생각 하니 참 벌써 기분이 좋다.
그렇게 나도 보송보송 잠이 들었다.
잠이라는 건 잘 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난 여행 전까지만 해도 거의 낮잠에 들어본 적이 없다.
낮잠을 자면 리듬이 깨지는 기분이랄까. 근데 한번 자고 나니 나쁘진 않다.
여행의 짬이 생기다 보니
이른 아침엔 산책하고 낮엔 쉬고, 해 질 녘이면 나가서 다시 볼일 보고
늘 9시 전이면 들어오는 패턴이 제일 효율성 있고 스스로 안전에 최적화되는 리듬.
잠에서 깨어
제일 먼저 빨래가 잘 말랐는지 확인하는데
비가 오고 있다..
잘 때 무릎이 저리저리 하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 일이 되어버려
급 우울해진다.
이럴 땐 먹어야지.
짐승처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마시고
그러다
별생각 없이 꽁꽁 묶어놨던 가방을 확인한다.
열쇠로 와이어를 푸는데..
열쇠 구멍이 망가졌다. 날벼락이다.
천천히 살살 다시 열쇠를 돌리는데
열쇠도 부러졌다.
음.. 총제적 난국이다.
존망이라는 말이 제일 어울릴듯한 표현이 아닐까..
뺀치로 끊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뺀치가 있을지도 만무하고
가방을 찢어야 하나.. 고민에 스트레스받는다.
또 급 당이 떨어진다.
고기가 먹고 싶다.
온통 VEG. 야채뿐. 살 빠지는 소리..
점심도 그럭저럭 또 채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를 반기는 배낭을 보니 또 한숨이 난다.
거대한 절망감이 생긴다.
영화나 한편 봐야겠다. 꽁꽁 묶여 있는 배낭의 기운 탓일까
영화도 그다지 들어오질 않는다..
담배만 폈다.
답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가보지 않은 길이 나온다
이 작은 동네에 이런 길도 있었나 할 정도로 아기자기한 길이 보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고
베트남 남부. 무이네와 너무 꼭 닮아 있다.
관광지의 해변이 아닌. 피싱 빌리지처럼 어선이며 어구들, 비릿한 바다 냄새까지도 너무 똑같다.
아주 잠시지만 오버랩에 베트남에 다녀왔다.
시장과 연결이 되어 있는 길은 어둠이 내리지만 더 활기를 띤다.
계속해 가랑비가 내린다.
계속 내리는 비는
동네 특유의 비린 냄새와 무한 노상방뇨의 지린 냄새가 뒤섞여 두통을 부른다.
하릴없어 기차역으로 가 다른 지역의 이동 시간표와 가격을 알아볼 겸이다.
멀리서 알록달록 조명이 건물을 감싸고 있다.
멀리서 보는 게 못내 아쉬워 찾아서 간 성당.
그리고
보자마자.
아놔~
허무함이 잔뜩 묻어났다.
이유인즉.
멀리서 볼 때 그만큼만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아랫부분은.. 조명이 없었다.
낚였다.
허무함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
지마트 발견.
마트다. 바코드로 결재. 인도 신세계. 과자 몇 개를 간식으로 사 왔다.
세렌디피티. 뜻밖의 즐거움이라 하지 않던가. 조명 때문에 온 이곳에서 실망감을 안고 가는 길. 마트가 뜻밖의 행복을 줬다는 것.
세상엔 돌아보면 얼마든지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이 많이 있다는 것.
힘들고 지칠 때면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주윌 한번 둘러보라.
그 속에 충분한 위안과 위로가 되는 어떠한 것이 있을 테니.
두 손 가득히 돌아가는 길. 기분이 좋다. 그다지 큰 이유는 없다. 뭘 하나 한 게 없다는 게?
우리네는 말이다. 쉴 때도 계획을 세우니 그 얼마나 피곤한 일의 연속인가.
쉴땐 그냥 쉬시라.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는 걸로.
나도 가방과 일심동체가 된 와이어 줄은 내일 걱정하겠다.
두 손 가득하니 기분 좋게 잠들겠다.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