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후
후(코친)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지
내가 누군가와 있는가가 중요한지
바보처럼 알지 못했다
내가 지독히도 바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젠 생소한 곳에서의 맞는 아침도 점점 어색해지지가 않는다
또 다른 공간 또 다른 침대에서 눈을 뜬다
큰 지역임에도 신기하리만큼 고요했다.
시끄러운 클락션 울림이라던지 주인장의 노크도 없었다.
밤사이 모기가 많았다는 게 흠이긴 했다.
쉽사리 일어서 지지 않는 몸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니 빙글빙글 꽤 요란스럽게 돌고 있는 선풍기가 중얼중얼 거리는 것만 같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너무 많은 생각에 쉽사리 잠들지 못한 지난밤이었지만
아침이 이상하리 만큼 편안하게 다가왔다.
정말 힘들게 다시 온 여행임을 잘 안다.
아무 일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고
별일이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생각에 여행은
무엇을 얻기 위해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나 스스로 임에 더 잘 알고 있다.
조금은 조금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지내도 괜찮다.
비워버리자.
그리고
후회하지 말자.
사방이 높은 건물들로 가로막혀 있지만
널찍한 창을 열고 하루에 첫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그 독한 한 모금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스타트 총성과 같다.
어제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가격이라 망설였던 호텔
이름만 호텔이 아니었다.
샤워기 부스가 달려있고
따뜻한 물까지 나오는 걸 보니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러 나가는데
젠틀한 지배인 할배의 아침인사.
정말 기분 좋아지는 미소.
어제까지 완전 인도가 조금은 다른 느낌의 인도
묘하다 기분이.
이럴 때 하는 말일랑
세상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
이런 기분을 더해 종업원에게 나비넥타이 잘 어울린다 했더니 웃음이 귀에 걸린다.
그것이 시작으로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코친의 홍보대사가 되어
괜찮은 곳들을 줄줄 나열해 줬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알아듣는 척했다.
이상하게 오묘한 기분 속으로 점점 빨려 든다.
아침 터라 그렇게 덥지도 않고 걷기에도 참 좋다.
대도시 같은데 막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고 조금은 점잖아 보인다.
호텔 지배인 할배처럼.
포트 코친 가는 길.
여기저기에서 북 페스티벌, 밤부 페스티벌 등 아지자기한 작은 축제들이 많다.
포트 코친은 섬마을이다.
겨우 4루피에 생각보다 안락한 배를 탔다
또 생각보다 긴 시간을 기다리다
아주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그렇게 도착한 포트 코친은 아주 오래된 섬마을
첫 느낌만으로도 참 아기자기하다.
그간 남인도에서 보지 못했던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즐비했다.
참 그리웠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마이솔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껄떡거리며 회의감을 느꼈는데 마음을 고쳐먹은 순간부터 이었을까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기분
세상을 다 가진 기분
너무 좋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한 번쯤 꼭 보고 싶었던 까따 깔리 극장도 보이고, 포트 코친의 자랑 중국식 어망도 보인다.
어망덕에 수산시장이 발달되 있을까?(수산시장이라기도 발달이라기도 어설프지만..)
포트코친을 둘러싼 해변과 중국식 어망은 그 존재만으로 베스트 포토존이 된다.
거닐다 보니
이곳은 작은 천국이다.
너무 이쁘다.
여기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냥 좋아졌다.
포트 코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치며 물어본 숙소들의 가격은 가히 장난이 아니다.
프리 와이파이에 아침 조식까지.
이곳 인도에선 꽤 괜찮은 옵션이나 부담되는 가격임에 틀림없다.
뭐 상관은 없다.
오는 길도 멀지 않고 조금 걷고 배 타고 조금만 건너오면 된다.
하릴없이 걸어도
아무 생각 없이 있어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아도
될 것만 같은
이럴땐 고기가 최곤데
고기 고기 고기가 급 당긴다.
고급 져 보이는 레스토랑 메뉴판에서 발견한 beef 스테이크. 인도에서 소고기 발견.
안 먹어도 배부르다.
...
맛은.. 인도 맛. 그냥 웃음이 났다.
그렇게 즐거운. 기분 좋은 포트 코친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돌아가는 배에서 험악하게 생긴 인도인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아르반이라고 한국에선 이름 물어볼 때 어떻게 말하냐고. "이름이 뭐야?"라고 하니. 곧 잘한다.
지난번 함피에서 매튜가 프랑스 욕 가르쳐준 것도 며칠을 걸려서 외웠는데..
한국 사람들 수염 잘 안 기르던데 넌 왜 수염이 기냐고..
미안.
인도에 온동안 제대로 면도를 한번 못했네..
여행을 하는 동안은 면도가 잘 안되더라. 고려해볼게 아르반.
근데 너 이리저리 궁금한 게 많구나.
너 아까 나보고 일본인이냐 물어봤지? 너는 인도 사람 같냐고?
응!! 니가 미국에서 태어나도 인도인.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도 인도인 같아.
나도 일본인 같겠지만 한국인이야.
만나서 반가워....
에르나꿀람에 도착해서 돌아가던 길을 생각해놓았다.
그리곤 반대편으로 걷는다.
정안 되면 버스나 릭샤를 타면 되니까.
생소한 길은 언제나 불안하지만 늘 새롭다.
새롭다는 것엔 불안함 속에 설렘이 있다는 거겠지.
대학교 현수막에 그려진 체 게바라.
내가 20대에 가장 좋아하던 인물.
"우리 모두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참 멋있는 말이다.
시장을 뚫고 철공단지를 뚫고 사원을 뚫어 나온 대로변. 저기 멀리 숙소가 보인다.
초대형 백화점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보인다. 쇼핑의 목적은 전혀 없었지만 아니 가 볼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인도 최강의 쿨함을 선보인다.
쓰러지고 싶다.
좋아서..
괜스레 7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허접해 보이는 아이스크림집. 한 컵 한다. 음.. 역시 인도 맛이다.
어떻게 모든 음식에 인도를 넣을 수가 있을까. 미스터리다.
백화점이라고는 하나 허접함에 끝이 없다.
쓰러지고 싶던 백화점을 뒤로하고 향하는 숙소
분명 시끄러운데 그 느낌을 받지 못함은 무슨 연유였을까
오늘은 조금 전체적으로 위로를 받은 기분
나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해서 그렇진 않았을 테지
조용한 숙소 안에 위잉 위잉 돌아가던 선풍기가 수고했어 오늘도 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