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비 온다던데. 일요일까지 계속 내린다고. 비 오면 오지 말라고 전화했어. 빗길에 운전하지 마."
"안 그래도 비 많이 오면 다음 주에 가려고. 그렇게 할게. 그럼."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안 오기로 했어?
거실로 나가 커튼을 열었다. 비도 많이 왔지만 안개가 심해서 앞이 안 보였다. 그런데 어제 비 오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안 오기로 했냐니?
나는 안개 낀 아파트 앞 도로 사진을 두 장 보냈다.
-비도 오고 안개도 너무 심해서 운전은 못하겠어. 다음 주에 갈게.
-뭘 사진까지 보내고 그래. 제육도 해놓고 사골도 우려 놨더니.
-비 오면 오지 말라더니 사골은 왜 우렸어?
비 오면 오지 말라고 전화까지 먼저 하더니 밤부터도 비가 왔는데 왜 제육을 하고 사골을 우린 거지? 어제 그 얘긴 비가 와도 오란 소리였나? 이 정도면 엄마 말은 번역기가 시급하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거나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아버지는 술이나 담배도 못하고 오로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까지 일만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묵묵히 일을 하다가도 불쑥불쑥 자신이 여기 있다고 밝혀야 직성이 풀렸다. 어린 마음에도 차라리 아버지가 술, 담배를 했으면, 친구들이 많았으면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화를 풀 곳이 있다면 집에서 가족을 잡는 일은 덜할 텐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버지 눈치를 엄마가 보니 어린 나도 눈치를 봤고 동생들은 아직 그런 걸 잘 몰랐다. 언제부터였을까? 말귀를 알아듣게 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너 하나만 있었으면 진작에 도망쳤을 텐데. 쟤들까지 있으니 내가 도망도 못 가고 이제껏 살았지."
"너 외할머닌 내가 결혼한다고 할 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냥 알았다고만 했어. 그때 다른 엄마들처럼 이리저리 따지고 그랬으면 내가 결혼까진 안 했을 텐데."
"엄마는 진짜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그냥 다 싫어."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린 내가 봐도 엄마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엄마가 도망이라도 가면 아버지와 남겨져야 한다는 공포심은 말도 못 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를 때리거나 소리를 질러 훈육을 한 적은 없는데도 엄마가 없이 아버지와 남겨지는 상상은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엄마의 얘길 들었다. 아버지만큼이나 엄마의 기분도 종잡을 수 없었고 나는 집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좁은 집에서 어느 쪽도 피하려야 피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를 갔다. 아버지도 점점 집 안을 뒤엎는 일이 줄어들어 갔다.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직 속에 있는 말을 할 상대가 나 밖에 없는 듯했다.
나는 점점 엄마가 하는 말에 갇히고 있었다.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 말을 부정하고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도 못한 채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동네를 벗어나 집에서 1시간쯤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학교에 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갔다. 신나는 일이었다.
그 날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다음 날은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고 친구들과 시험이 끝나면 놀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동네 제과점에 가서 케이크를 샀다. 생크림 케이크이었다. 아무리 시험 기간이지만 엄마 생일이었고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동생들과 케이크에 초를 켜고 기다렸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 선 엄마는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면서도 조금 웃었을 뿐이었다.
초를 불고 케이크를 잘랐을 때 사달이 났다. 스펀지케이크 안쪽에 재앙을 예고하듯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엄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거 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고등학생이나 돼 갖고 제과점 가서 케이크 하나 똑 부러지게 사 오질 못 해? 하여간 먹는 것만 밝혔지.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똑똑하게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어. 아우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모지라."
밑도 끝도 없이 폭격이 시작됐다. 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투시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똑똑해도 생크림이 겉에 덮인 케이크 안쪽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저씨! 이거 곰팡이 핀 케이크 아니에요? 오늘 만든 거 맞아요? 증명해 보세요!라고 똑똑하게 케이크를 골랐어야 했나? 더 큰 문제는 그때 아버지가 퇴근해서 그 모든 상황을 보면서 시작됐다.
"왜 그래?"
"아니 이거 봐. 이 앞에서 사 왔다는데 이런 걸 사 와갖고. 아우 진짜 내가 속 터져."
그 말을 하면서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이제와 느끼는 거지만 엄마는 울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울 기회를 준 것이고. 엄마까지 엉엉 울기 시작하자 집 안은 초토화 됐다.
아버지는 상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니. 아까 여자애한테 8시쯤 생크림 케이크 팔았지? 어디서 곰팡이 난 걸 팔고 있어? 지금 당신네들 때문에 집안이 쑥대밭이 됐어! 알아? 뭘로 보상할 거야?? 하여간 당신네들 신고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가만 안 둘 거야! 됐어! 끊어!!"
아버지는 그야말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고 안 그래도 큰 소리만 나면 경기가 날만큼 무서워하는 나는 오랜만에 그 자리에서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가장 큰 잘못을 한 건 날짜 지난 케이크를 판 제과점이지만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건 엄마와 아버지라고. 이게 그렇게 큰 일인가? 우리 지금 정상인건가요? 나는 그날 밤 내내 울었고 다음 날 아침에 어디에서 크게 한 대 맞은 눈을 하고 학교에 가서 시험을 봤다.
시험이 끝나고 서로 반이 달랐던 친구들과 만났을 때 00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 너네 엄마한테 오늘 아침에 전화받았어. 어제 무슨 일 있었다며? 대충 들었어. 아줌마가 너랑 오늘 재밌게 놀라고. 너 기분 좀 풀어주라고 하시더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해서 케이크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짧게 어제 있었던 난리를 얘기해줬는데 그때 난 놀라운 얘길 들었다.
"케이크에 곰팡이가 폈다고 싸움이 났다고? 우리 집 같았으면 웃었을 거 같은데? 아니 웃기잖아. 케이크에 왜 곰팡이가 펴? 케이크에 곰팡이 폈으면 돈으로 돌려받던지 바꿔 오면 되지 그걸 갖고 또 뭐 그렇게 집 안이 뒤집어졌냐?"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내 등을 토닥이며 에이, 잊어버려, 신경 쓰지 마 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런 일이 벌어져도 웃는 집이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우리 집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런 날짜 지난 빵을 오랫동안 팔아오다 진짜로 신고를 당했는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 제과점은 없어졌다. 버스를 타려면 무조건 그 제과점이 있던 자리를 지나가야 했는데 한동안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지나다녔다. 그 사장님이 너무나 원망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