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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Jun 05. 2020

전직 바리스타가 파자마 입고 내려주는 커피

남편은 바리스타였다. 검은색 긴 앞치마를 입고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는 일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카페 밖으로 나오면 친구였지만 바에 들어가는 순간 저 친구 일 잘하는 구만. 하는 마음으로 그저 무심하게 볼 수 없었다고 할까? 아마 내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마음이 넘어간 지점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상당 부분 남편이 카페에서 일하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셔츠를 걷어 올린 채로 힘을 주어 템핑 하는 모습이라던가, 신중하게 핸드드립을 하며 커피가 잘 내려오는지 확인하는 얼굴 같은 것. 남편은 특히 손이 예쁜데 그 손으로 카페에 놀러 온 내게 자신이 만든 커피를 내미는 모습이 좋았다. 



남편은 이제 전직 바리스타가 됐고 더 이상 커피 관련된 일은 하지 않는다. 이제는 홈 바리스타일 뿐이지만 오래된 사랑을 쉽게 져버리지 못하듯 집에는 커피 장비들이 넘쳐난다. 다양한 경로로 이 집에 도착한 커피 용품들은 저마다 추억이 있다. 이제 남편은 검은 앞치마 따위는 매지 않는다. 굳이 복장이라고 한다면 파자마를 입고 커피를 내린다. 아침과 혹은 저녁식사 후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라테를 만든다. 파자마 덕분인지 그 뒷모습이 예전처럼 멋있다기보다는 귀여운 쪽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남편이 커피를 만들 때의 그 손을 나는 좋아한다. 





남편은 그 시절이 그리울까? 가끔 궁금하다. 커피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데도 혼자서 커피를 배우고 카페에 이력서를 넣었던 그 시절 말이다. 남편에게 커피는 그저 한 때는 뜨거웠으나 이제는 식어버린 꿈에 지나지 않을까? 아직은 미련이 남는 꿈일까? 

가끔 '처음부터 커피 일은 하지 말걸, 다른 사람들처럼 회사 취직하려고 스펙이나 쌓을걸' 하는 남편의 투정에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것 하나만으로도 반짝거렸던 남편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습에 반한거야! 그냥 이제는 취미로 커피를 만드는 게 좋다고, 집에서 좋은 원두를 사서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남편의 말을 믿지만 그래서 나는 조금 마음이 저릿하기도 하다. 


남편의 눈에는 아직 미숙해 보여도 나도 이제 내가 마실 커피 한 잔 정도는 능숙하게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행여나 잘못 눌러서 뭐든 망가질까 봐 머신을 켜는 일도 주저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혼자 있을 때면 몇 잔이라도 내가 마실 커피를 만들어 마시지만 남편과 있을 때는 남편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남편이 여전히 신중한 태도로 커피를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으니까!


여기 아메리카노 한 잔 주시죠?


장난스러운 내 주문에 남편은 입을 삐쭉거려도 결국 바 앞에 선다. 오로지 내 커피만 전담으로 만들어주는 전직 바리스타를 둔 기분이 꽤 으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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