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지만 동물을 무서워해서요."
이 말을 할 때는 아직도 얼굴이 빨개지고 이마에서 땀이 난다. 한껏 미안하고 민망한 얼굴이 되고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길 위에서, 식당에서 나는 그렇게 작아진다.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질문을 스스로 자주 해본다. (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상황에 따라 바뀌긴 하지만 고민 고민 끝에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되곤 한다. 그중 하나가 다시 태어난다면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특출 난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닌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바람이 최종까지 올라가는 걸 보면 그게 내 인생의 엄청난 스트레스인 것은 확실하다.
언제부터 동물을 무서워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4-5살 때는 강아지를 안고 찍은 사진도 있는 걸 보면 그때는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확실한 기억은 초등학생 때부터다. 초등학생 때부터 길을 가다 개가 나타나면 바로 코 앞에 집을 두고도 한참을 돌아갔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동물을 좋아해서 아버지가 몇 번 강아지를 데려온 적이 있다. 그때마다 거의 경기를 일으키고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딸 때문에 결국 그 강아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동생들은 그런 나를 탓하고 원망했다. (나 같아도...)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그 두려움이 사라질 줄 알았다. 내가 너무 어려서 무서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20살이 되고 30살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길가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나면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간다. 동물을 피한다고 무리해서 길을 건너다 차에 부딪칠 뻔한 적도 있다. 물론 큰 개도 있지만 작은 고양이나 강아지도 있었다. 이건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나 지인의 집에 가기 전에 꼭 동물을 키우는지 체크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고양이를 키우면서 절대 그 집에 갈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만난 친구라고 해도 이런 내 공포증을 잘 잊어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해' 정도의 사람들은 만날 수 있지만, 어른인데 동물을 본다고 도망을 치거나 옆에 오기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우리 집 개는 안 물어. 괜찮아."
그럴 때마다 민망하고 미안한 건 내 몫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나 때문에 약속 장소를 옮겨야 하거나,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한 식당은 예약을 취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아도 정말 싫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공포증을 어떻게 치료해야 되는지 사는 내내 고민이 깊었다.
몇 년 전 동물을 키워서 매일 보다 보면 공포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입양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내 고민을 듣고 동네 지인이 바로 입양하지 말고 자신의 집에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가서 지내보라고 했다. 순한 애니까 괜찮을 거라고. 남편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다. 남편은 워낙 동물을 좋아하기에 요크셔테리어인 그 강아지를 보자마자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 작은 강아지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렸고 보다 못한 지인은 그냥 덥석 내 품에 그 강아지를 안겨줬다. 3n년 인생 처음이었다. 동물을 안아본 것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따뜻하고 물컹한 느낌이었다. 안겨준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강아지를 안아서 그대로 집으로 왔다. 하필이면 남편은 야간 스케줄 근무라 나와 그 강아지만 둔 채로 출근을 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작은 강아지는 당연히 낯선 환경이니 내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나도 tv를 켜 놓고도 오로지 강아지에게 온 신경을 뺏겨서 집중할 수 없었다. 아까는 분명히 안고 오기도 했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강아지는 자꾸 나한테 오는데 나는 무서워서 자꾸 피하고, 밤이 새고 새벽이 돼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해가 뜨기도 전에 집에서 나와서 놀이터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퇴근하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남편은 그 앞에 서 있던 내가 와이프라고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들어가려고 했다. 남편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남편은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결국 아침이 밝자마자 강아지는 다시 지인의 집으로 데려다줬다. 남편은 그 날 확실히 알았다고 했다. 내가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이 병에 가깝다는 것을.
그 날 이후로 남편은 길을 가다가도 동물이 보이면 먼저 말해주고 자신이 앞서 막아준다. 여행을 가도 동물이 보이면 피해 갈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럴 때마다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이 원인을 찾고 싶었다. 원래 느껴야 하는 공포나 두려움의 수준보다 더 심각하게 느낀다면 그것을 공포증이라고 한다는데 도대체 이 동물 공포증의 원인이 무엇일까? 왜 이 공포증이 나한테 찾아왔을까?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소설가의 귓속말'이라는 책을 만났다. 무려 첫 페이지에 쓰인 이 글을 보고 나는 내가 평생 찾던 그 궁금증에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한적한 길을 걷다가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 큰 개를 만나면 머리끝이 쭈뼛 솟는다.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덩치 큰 개는 두려움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손색이 없다. 개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는, 가야 하는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낮은 소리로, 흡사 내장 깊은 데서 무엇을 끌어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면 발이 땅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아 움직이지 못한다. 실제로 나는 어린 시절에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피해 먼 길을 돌아 학교에 다닌 기억이 있다. 개에게 종아리를 물린 기억도 있다. 어쩌자고 시골 사람들은 개를 묶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개들이 아이들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쫓아다니고 물고, 아이들은 개들을 피해 도망 다니고 울고 물리고 했다.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의 개의 이미지는 내 공포의 인자(因子)이다.
그렇지만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 개는, 물지도 않고 쫓아오지도 않는데도 왜 두려운가. 물 수 있고 쫓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개는 무는 동물이 아니라 물 수도 있는 동물이다. 물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하는데, 어떨 때 물고 언제 물고 왜 물고 어떻게 무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할 수 없다. 그 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 수 있고 쫓아올 수 있는 것들은 물지 않고 쫓아오지 않을 때도 무섭다. 사납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위협 앞에서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고 뻣뻣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 어떤 짓을 언제 어떻게 왜 할지 모르는 사람은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개와 같다. 무서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때때로 술(이나 마약이나 이념이나 종교나 사랑)에 취한 어떤 사람(들)은 무섭다. (소설가의 귓속말/이승우)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눈치라는 것을 배우기 전에 나는 동물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소위 분위기라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일에 늘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나의 부모는 도통 그 흐름을 읽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집안이 쑥대밭이 되면 그전에 밥상에서 나눴던 말들을 곱씹었다. 무슨 말 끝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어린 나는 계속 그 전 상황을 되짚었다. 그런데 도무지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면서 예측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준비할 수 없는 상황,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불안감 때문에 늘 배가 아팠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눈치를 보듯 나는 친구들의 눈치를 봤다. 친구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친구가 화를 내지 않도록 내 기분 따위는 억눌렀다. 화를 내는 친구는 안 놀면 되는데 그때는 화를 내는 친구의 기분을 어떻게 해서라도 맞춰서 그 밑에 있고자 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작고 피할 수 없어서 때론 더 잔인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를 완전히 덮쳐버렸다.
나는 점점 예측이 불가능한 모든 상황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동물은 특히나 그랬다. 표정을 읽을 수도 말을 들을 수도 없다. 이들이 언제 나를 쫓아올지, 나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빌지, 아니면 그대로 내 종아리를 물어버릴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동물이 쏟는 무한 애정도, 언제 물지 알 수 없는 공포도 모두 내가 예상 가능한 범위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동안 그 두려움은 내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이제는 내가 통제할 수 있어, 대처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머리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측이 불가능한 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소망과 같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도망친다고 해도 저녁이면 결국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예측이 어려운 사람도, 예측이 어려운 상황도 나는 그때의 나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나는 주문을 걸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다음 생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는 동안 이 공포증을 치료해보고 싶다. 마음껏 그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쓰다듬고 안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 고양이가 있는 가게도 서슴없이 들어갈 수 있고,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도 줄행랑을 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삶의 불안과 긴장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사라지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풍성한 생명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는 그 날을 지치지 않고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