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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Jul 27. 2020

익숙해진 계약 종료와 구직 사이

19살에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미니스톱에서였다. 재수가 결정 난 상황이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신처럼 보였다. 얼마나 공부를 잘했을까? 그들이 나에게 내미는 커피우유나 삼각김밥의 바코드를 찍으면서 나는 내내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부럽지는 않았다. 부러운 감정은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생긴다. 이 학교는 그 범위를 넘어선 곳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아웃백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곳이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때 이력서를 냈는지 모르겠다.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인 나에게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아르바이트라는 어떤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매니저는 면접을 보는 동안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나를 어째서 뽑아준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어리바리하는 나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준 선배들 덕에 나는 결국 그만두지 않고 그곳에 오래 다닐 수 있었다. 일은 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이런 단순 노동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패밀리 레스토랑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와 어둑한 조명, 또래의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좋았다. 아웃백은 그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설픈 호기심으로 시작한 그 일을 대학 다니는 내내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동기들은 교직 이수니, 토익이니 취업을 위해 2학년 때부터 노력했다. 나는 학과 수업은 열심히 들었지만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디 나를 뽑아준다는 회사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면서 뜬구름만 잡고 다녔다. 아르바이트, 축제 행사 보조 요원, 유럽 배낭여행 같은 것들에 심취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당연하게 나도 4학년이 되었다. 덜컥 겁이 났다.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소위 스펙이란 것이 없었다. 고백하면 그 스펙이 뭔지도, 뭐가 필요한지도, 그래서 그걸 얻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부랴부랴 한 것은 우습게도 한자 2급 시험이었다. 토익도 아닌 한자 2급을 왜 갑자기 따겠다고 도서관에 처박혔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그럼에도 나는 진지했고 아무리 외워도 한자가 외워지지 않아 울기도 했다. 그리고 대망의 시험 날, 그 교실에 초등학생의 숫자가 꽤 많은 것을 보고 쓸모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교 졸업식은 가지 않았다.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해놓은 게 없어서 부끄러웠는데 그걸 감추려고 세상에 냉소적인 척했다. 

애초에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나는 내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수준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니까 이 수준 정도는 어디에서 받아주는 것인지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그렇게 아르바이트와 계약직 사이를 전전하는 일들이 시작됐다. 그러다 처음으로 직장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곳을 다니게 됐다. 이력서를 쓰게 된다면 첫 줄에 쓸 수 있는 경력이었다. 





그 회사도 처음에는 2년의 계약기간이 있었다. 2년 동안의 평가를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을 고려해 본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 누군가는 계약이 종료됐고 누군가는 정규직이 됐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가늠이 어려웠다. 나는 정규직이 됐다. 정규직이 됐다고 해서 연봉이 눈에 띄게 상승한다거나, 다른 처우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 계약 종료 시점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뿐이었다. 하는 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결혼했다. 결혼하고 1년 정도 더 회사를 다녔다. 출퇴근 시간이 2시간(왕복 4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야근하고 집에 오면 밤 12시가 되기도 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게 의미가 있나? 몇 시간 뒤면 다시 이 지하철을 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울면서 퇴근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그렇게 퇴사했다. 


그 이후부터는 다시 계약 종료 시점이 명시된 계약서를 쓰는 일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불합리한 처우와 기준 없는 계약기간에 대해 화도 났고 불만도 많이 토로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내 위치는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계약을 하는 거였다. 누가 와도 대체가 가능한 일. 그걸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12개월을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11개월만 계약해주는 회사를 나는 띄엄띄엄 4년 가까이 다녔다. 그러니까 11개월이 되면 잠시 일을 쉬었다가 한, 두 달 후에 다시 재입사를 했고 다시 11개월을 다니면 계약이 종료됐다. 처음에는 고작 그 퇴직금 때문에 11개월씩밖에 계약을 안 해주는 이 회사에 치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집에서 가깝고, 야근이 없고, 공휴일이면 쉬는 조건의 사무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 11개월 뒤면 실업급여가 나오고 실업급여를 받다가 재입사하면 되니까.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맞아 올해 나는 완전한 계약 종료가 됐다. 놀랍진 않았다. 이제는 계약 종료가 너무 익숙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학 졸업 후 첫 번째나 두 번째 직장에 정착해서 10년쯤의 경력을 쌓고, 과장 정도의 직급을 가진 친구들을 볼 때면 경력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전혀 없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돈을 벌고 있긴 한데 나한테는 경력이 없었다. 그때그때 급하다고 일을 덜컥 시작하지 말고 진득하니 오래 다닐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는 말도 듣고 나 스스로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매달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해결되어야 했다. 그 돈이 당장 급하니 나는 또 급하게 일을 구했고 그런 일들은 급하게 종료됐다. 




나는 오늘 또 한 번의 합격 문자를 받았다. 이번에는 5개월이다. 5개월이라도 일단 일을 할 수 있으니 나는 출근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예전에는 일이 곧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고, 언제든 교체 가능한 일만 하는 내가 하찮아 보였다. 하지만 몇 번의 계약 종료를 겪으면서 내가 하는 일과 나를 분리시켜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일은 그저 생계를 위해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내가 하는 이 경제활동은 나를 구성하는 많은 부분 중에 하나다. 이것이 곧 내 인생의 성과는 아니다. 이것이 그저 자기 위로를 위한 어설픈 변명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강제로 쉬게 되는 기간에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식물을 기르고, 산책을 하는 시간을 빈둥거리는 시간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런 활동이 나라는 사람을 더 많이 구성하고 있음을, 내 안에 그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 주 월요일 다시 일을 시작한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긴장과 약간의 설렘은 있지만 예전처럼 큰 기대나 허황된 계획은 없다. 이제는 이런 부분에서는 무덤덤해지고 의연해지는 삶의 경력이 쌓인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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