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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Dec 15. 2015

어른들을 위한 마취제

도피처가 되어주는 각양각색의 컬러링북들

일자리를 구하면, 그것은 오늘날 모든 스물대여섯살들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지만, 그 즉시 알게 됩니다. 낮에도 밤에도 샤워를 할 때에도 도서관에서 토익문제를 풀 때에도 엄마한테 용돈을 달라고 할 때에도 카페에서 애인을 기다릴 때에도 우리가 오매불망 바라던 그 자리, 그 꿈이 하나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오히려 그 꿈은 우리 눈 속의 반짝반짝하는 희망, 꿈, 용기, 그리고 뭔가 멋진 것을 해내고 말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갉아먹는 기생충으로 돌변하기 쉽다는 사실을요. 정말이냐고요? 취직을 해서 회사에 몇 년쯤 다닌 오빠나 누나들을 보세요. 이름만 대면 온 세상 취업준비생이 기립박수를 칠 만한 좋은 회사에 다니는 오빠들이 제게 하는 이야기는, 남편 잘 만나야 돼, 마포의 아파트 값은 너무 비싸 뭐 이딴 것들 뿐이라니까요. 이제 서른 몇 살이 되어버린 그 오빠들 역시 스물 몇 살일때에는 눈이 반짝거리고, 장난기가 가득하고, 삶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수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도 몇 주 전에 제 컴퓨터와 책상과 의자를 받았습니다. 거기 앉아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저는 무서워졌어요. 지구상에 내 컴퓨터와 책상과 의자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덜덜 떨었던 취준생 때보다 더요.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쳐 내고,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할 일이 없을 때에는 핸드폰으로 잡다한 딴짓을 하면서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해 내리라 믿었던 제가 사실은 쓸모없는 일을 하다가 죽어버리는 운명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요. 내 머리통이 회사에서 시키는 이런… 이런… 이런… 것들을 하려고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버린거에요.

왜냐하면 회사에서 시키는 일들은 정말로 아름답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고, 재미는 물론 더럽게 없고, 세상을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는데 아주 요따만큼도 기여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일만 몇 년씩 하는 사람들이 눈 속 반짝거리는 별을 잃어버리는게 당연한 노릇이었어요. 저는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보멍청이 썩은 동태 눈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제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은 오직 글을 읽고 문장에 감탄하고 그 아름다운 문장의 발 뒷꿈치 각질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글을 타닥타닥 써내는 것 뿐이었어요. 이렇게 조금도 생산적이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고 회사 컴퓨터의 전기와 제 손가락 관절을 소모하는 이 일들이 저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누가 시키지 않은 일로 제 뇌를 쓰고 그 결과물에 혼자서 마음을 들썩들썩하곤 했으니까요.

서점에 갔는데, 베스트셀러 코너에 색칠공부 책이 있었습니다. 이천십오년은 너무나 각박하잖아요. 어떤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성경말씀에 나오는 지옥이 바로 한국이라고. 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오래 생각할수록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비교는 필수, 자괴감은 선택인 이 지랄같은 한국, 거지같은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 그들은 냉소적인 얼굴 속 상처받은 영혼에 마데카솔을 발라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에요. 새 살이 돋아나는 동안, 까칠까질한 것들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 평화롭고 안전한 보호막 속에 있어야 하니까, 깨작깨작 멍하니 색칠이나 하고 있으라는 거겠죠. 세상에나 만상에나, 머리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지,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으니 공부만이 살 길이다 뭐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아온 우리들의 종착역이 멍때리기용 색칠공부 책이었다니! 어른들을 위한 마취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 병든 사회를 바라보며, 저는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색칠공부를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똑똑한 것도 아니죠. 안 그래도 세상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려고 난리부르스를 추잖아요. 그런 세상 속에서 내 눈을 반짝반짝하게 만들고 어깨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쓰잘데기 없는 것이 무엇인지 오래오래 생각하고 그걸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진부하고 지겹고 오글오글한 이야기는 물욕의 왕과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저도 페이스북에서 삼둥이 동영상을 보면서 하루에 열두 번씩 멍청해지지만… 어쨌든 저는 월요일 오전 세시 이십사분에 회사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 일하기 싫어 죽겠고 회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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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컬러링북들

가격 : 보통 8000원대~10000원대
비밀의 정원+파버카스텔 36색 색연필 세트상품은 3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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